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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매너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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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un Leymet May 06. 2021

봉주르의 가볍거나 무거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작은 방에 테이블이 몇 개 있었고, 두 명이 벌써 와서 앉아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같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모처럼만에 한 공간에서 만나는, 서로를 알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이었다. 평소에는 이미 아는 한국 사람을 만난다. 서로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프랑스 하늘 아래서 모이는 일은 흔치 않다.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뒷모습을 보이고 앉아 있다. 당시 20대였던 나에게는 그저 여느 평범한 아저씨처럼 보였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보다 어린 30대 후반의 남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지나치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를 마주 향한 방향에 있던 여자가 눈인사로 답을 한다. 남자는 대답이 없다. 들리지 않았나 보다. 내 목소리가 조금 작았던 것 같다. 낯섬은 목소리를 작게 만들 때가 있다. 나는 자리로 향하며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다시 인사를 했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아직도 나의 목소리가 작았던 것 같고, 그 남자는 앞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나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나를 보지 못했다고 하자. 내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줄 몰랐나 보다. 텅 빈 눈으로 사색에 빠져있었다 하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자연스러운 눈 맞춤을 시도하며 인사를 했다. 상냥함으로 목소리를 포장했다. 남자가 나를 봤다. 대답도, 눈인사도 없다. 여전히 텅 빈 눈빛이었다. 세 번이나 인사를 건넨 것이 멋쩍었다. 그렇지만 크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당황스러움이 불쾌함을 덮었다. 이 상황이 그리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문득, 인사하는 나를 오히려 그가 멋쩍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이니까. 어쩌면 그는 답인사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내 인사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에게 나는 인사를 해야 마땅한 어린 사람이었고, 그에게 그는 인사를 받아야 마땅한 윗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프랑스식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어쩌면 나는 또 그에게 프랑스식 인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낯선 이에게 인사를 했을 때, 대답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보거나, 심지어 불쾌해하는 경우가 있었다. 더러는 우리가 아는 사이이냐고 묻는 듯한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인사로 인해 한국인인 상대에게 본의 아니게 경계심을 키운 경험이 종종 있다.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다. 프랑스의 적당히 추운 겨울에 익숙해져서 살다가 오랜만에 맞은 한국의 겨울은 매우 추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 추워서 더는 헤맬 수 없었고 인적도 별로 없었다. 20대 초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셋이 황량한 거리에서 연분홍 꽃잎 같은 청춘을 흩뿌리며 마주 온다. 모두 앳된 얼굴에 예쁘게 화장을 했다. 한 여자의 한쪽 팔에 파일이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길을 잃어서 길을 좀 묻고 싶은데요, 괜찮을까요?"


나를 멀뚱이 쳐다본다.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건네는 나를 보며 흠칫 놀라서 멈춰 서고는 아무 말이 없다. 길을 묻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저기요'라고 말을 시작했어야 했다. 아무 대답이 없어서 조금 당황한 나는 길 잃은 문장을 장황하게 주절대고 있었다.


"모르겠는데요!"


파일을 들고 있던 귀엽고 새침한 여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더니 한마디를 던지고 휙 돌아섰다. 친구들도 따라나선다. 그 여자가 말한 '모르겠는데요'의 톤에서 왠지 모르게 '알아도 안 가르쳐 줄 거지 롱, 쳇!'이 들렸다. 핸드폰이 다 해주는 세상에서 살면서 핸드폰으로 길을 찾지도 못하고 행인을 붙잡아 길을 묻는 나는, 어쩌면 사심을 가지고 말을 건네는 경계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나는 약장수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뱅상이 물었다.


"지난번에 삼계탕 집에서 너는 서빙하는 점원에게 인사를 하고, 웃으면서 주문을 하더라. 왜 그렇게 친절했던 거야?"

"내가 무엇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지?"


일본이 좋아서 석사를 마치자마자 그리로 건너가 살기 시작했던 뱅상이었다. 방학 동안 잠시 한국에 온 우리 커플을 만나겠다고 기꺼이 한국으로 와주었다. 번드르르한 얼굴의 뱅상은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여사친이 많았다. 자기가 만난 한국 여자 친구들은 식당의 서버들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고 했다. 더러는 무례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내가 그들에게 무례할 필요는 없잖아. 난 서로가 인격적이고 싶을 뿐이야."


차도남, 차도녀라고 하던가?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시크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시크한 모습을 좇는 것이 유행이 된 듯하다. 고백하자면, 나도 20대 초반엔 그런 소리가 썩 멋있게 들렸었다. 세련되고, 차갑고, 도도하거나 냉소 적여 보일 때 우리는 시크하다고 칭찬에 가까운 소리를 한다. 시크하다는 말 대신 시니컬하다고 쓰는 것이 오히려 더욱 적합해 보인다. 불어에서 시크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고급스럽거나 세련된 것, 또는 멋스러운 것을 가리킬 때 시크하다고 하기도 하고, 친절한 행동이나 세련된 호의에 대한 표현으로 시크하다는 표현을 쓴다. 냉소, 차도와는 거리가 있다.


한국식 시크함이 유행이어서 일까? 상점 점원이나 식당의 서버에게 차갑고 도도하게 대하는 것을 시크하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그 유행에서 온 것일까? 시크함이 유행이라고 타인에 대한 인격적 모독을 허용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상대를 노예로 하락시켜서 자신의 신분적 가치를 높이고 싶은 계급 사회에 대한 복귀 욕구가 드러나는 순간인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유물로나 찾아볼 수 있는 가정교육이 문제일까?




"걔는 왜 나한테 인사를 하다 말다 하는 거야? 별로 대화를 하진 않아도 항상 인사는 하고 지내는 사이거든. 그런데 어느 때는 인사를 하고 어느 땐 하지 않는 게 이상해!"

"걔가 인사를 하지 않은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데?"

"걔가 친구들이랑 동그랗게 서서 대화를 하고 있었고, 내가 지나가면서 인사를 했는데 본체 만 체더라고."

"아, 그러면 친구랑 대화 중이어서 그랬나 보네."

"내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서 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인사도 하지 않는단 말이야?"


어학원을 다닐 때 여자 학생 기숙사에서 살았었다. 어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서로 인사를 열심히 한다. 타국에서 온 이들은 친구가 필요하고 불어를 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루빨리 이 문화에 물들어야 한다. 말이 짧은 우리는 밝게 인사를 하면서, 언어의 장벽에 갇혀 속시원히 나오지 않는 모든 말을 그 안에 함축시켰다. 우리의 '봉쥬르' 속에는 많은 말이 들어 있었다.


기숙사생의 대부분이 프랑스 여자 아이들이었다. 그들과의 인사는 항상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그런 찜찜한 기분이 어디서 오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그 기분을 이해할 만큼 프랑스 말도 문화도 알지 못했다. 지들이 친절하고 싶을 때만 친절한 것 같이 보이는 그 아이들이 참 도도하게 느껴져서 나도 더없이 도도한 표정으로 그들을 시크하게 지나쳤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갔다. 난 여전히 어학원 학생의 자세였다. 온 정성을 들여서 '봉쥬르'를 뻐꾹거렸다. 그러다가 하루는 한 아이에게 인사를 몇 번 씹히는 경험을 하고 기분이 별로여서 남자 친구에게 물었던 거다.


"걔는 인사를 할 거면 하고 안 할 거면 안 하는 거지 왜 했다 안 했다 제멋대로인 거야? 기분 나쁘게!"

"상대가 대화 중일 경우엔 굳이 인사를 하지 않아도 돼. 그러면 네가 그들의 대화를 중단하게 될 수가 있잖아."

"그래? 한국에서는 내가 누군가와 대화 중이라도 옆에 친구가 지나가면 적어도 눈인사라도 하는데, 여기는 그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뻔히 봤는데, 모른 척하란 말이야?"

"뭐, 상황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내가 대화 중에 있다면 굳이 대화를 중단시켜가면서 지나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할 필요는 없지."


한국 사람들과 길가에 모여 서서 한참 신나게 수다를 즐기고 있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갑지가 우리 중 한 명에게 인사를 한다. 말을 하던 나는 말을 멈춰야 했다. 서로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잠시 대화를 나누는 둘을 나는 말 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것 말고 할 것도 실은 없다. 내가 그동안 프랑스 물을 먹긴 먹었나 보다. 말을 중단하고 갑자기 들어와 인사를 하는 사람과,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와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떨고 있던 수다가 하찮게 휴지조각이 되어 버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제를 상실하고 단숨에 맥이 끊긴 우리의 대화. 이렇게 불구가 된 대화는 잠시 후 다시 이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그대로 증발되어 버리기도 했다.


프랑스 친구가 한 무리 안에서 대화를 하고 서있다. 대화가 무르익어 보인다. 눈이 마주쳤다면 지나치며 살짝 눈인사를 할 테지만 그럴듯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지나쳐 갔다. 친구도 나를 보지 못했거나 또는 보지 않았거나, 우리는 여하튼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잠시 후 대화 무리에서 흩어져 나온 친구들 다시 만났다.


"미안, 좀 전에 너 지나가는 거 봤는데 인사 못했어."

"네가 대화 중이라서 나도 그냥 지나쳤어."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치지 않았지만 적어도 서로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친구를 차갑게 쌩하고 지나쳐 버렸고, 친구도 나에게 정 떨어질 만큼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지나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것도, 무리의 대화가 깨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도 생활 습관의 일부이다. 둘 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고, 둘 다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 온 행동이기도 하다.




지인의 집에서 파티가 열렸다. 프랑스에서는 저녁에 시작하는 파티를 수와레 la soirée라고 부른다. 아침나절을 오전이라고 부르듯이, 수와레는 저녁시간 대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저녁에 시작한 수와레는 자정을 넘겨가며 계속되기도 한다. 파티에는 서로 아는 사람끼리만 부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래서 파티는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종의 사교의 장이기도 하다. 식당이나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에서 수와레를 하기도 하지만, 밤새 길어지는 대부분의 수와레는 집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다.


수와레가 마무리되는 모습은 다양하다. 비슷한 시간에 적당히 마무리하고 서로 인사를 하고 거의 동시에 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수와레가 길어지는 경우엔 한 둘씩 시간차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고, 더러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놀다가 잠을 자고 가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런 모임에서 먼저 자리를 떠났을 때,


"노는데 괜히 방해될까 봐 그냥 (인사 없이) 조용히 나왔어."


라는 말이 통한다. 프랑스에서도 그렇게 나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파티에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이 사람들이 왔는지에 따라서 그것이 허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파티에 참석한 모든 이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 것을 예의로 여긴다.


공교롭게도 프랑스의 인사는 볼 키스이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볼 키스가 사라졌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서로 볼을 맞대고 인사를 한다. 남자들끼리는 볼 키스 대신 악수를 하는 경우도 많다. 파티를 떠나는 사람들은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하나하나를 찾아가 마주하고 볼 키스나 악수를 하고 집을 나간다. 한 집에 모인 인원이 한 2,30명이 되는데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볼 키스와 악수를 하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한 명 한 명 인사를 하다가 결국에, 큰 소리로 모두에게 와이파이 손키스를 던져주며 인사를 마무리하고 떠나가는 사람도 있다. 명절날 대가족이 모여서 한참 놀다가 헤어질 때는 와이파이 인사는 너무 가볍다. 급하게 떠나야 하는 상황이 아니고는 예의를 갖추어서 모두가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인사를 한다. 당신과 함께 보낸 저녁 시간이 즐거웠음을 서로에게 일러주는 것은 매너를 갖추고 에티켓을 지키는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상냥한 의식이다. 헤어지는데 하는 인사에 이들은 많은 정성과 시간을 할애한다.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때는 이 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길고, 증발되어 버리고 싶을 만큼 불편하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했다. 식이 끝났다. 오셨던 모든 어른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뵈며 인사를 올렸다. 인사는 우리가 식장을 비워줘야 할 때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의 '봉주르'는 한국의 '안녕하세요'에 비해서 무게가 가볍다. 눈이 마주치면 모르는 사람에게도 툭툭 던지는 말이 '봉주르'이다. 처음에 프랑스에 왔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신기한 눈으로 이것저것 보다 보면 내 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도 실컷 들어왔다 나갔다. 나는 그들도 신기한 눈으로 보고 다녔겠지? 길거리의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봉주르'라고 인사를 했다. 신기한 눈을 한 나의 눈은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일 수 없었다. 비눗방울이 터지듯이 여기저기에서 '봉주르'라는 말이 향기를 품고 나에게서 터지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왜 나에게 인사를 하는지 몰랐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나도 그들의 '봉주르'에 나의 수줍은 '봉주르'를 퐁퐁 터트리고 다녔다.


이렇게 가벼운 '봉주르'가 무거워지는 경우가 있다.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을 할 때 프랑스식 '봉주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봉주르'라고 말을 시작하는 것을 간혹 까먹는다. 프랑스에 꽤 살았다 하는 사람들도 '봉주르'로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을 잊는 경우가 다반 수다. 상대에게 빠뜨리지 않고 해야 할 프랑스어 문장들을 머릿속에 가득 채워 담고 있다 보면 순식간에 '봉주르'를 흘리고 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한국말은 문장 끝에 달리는 동사에 격식을 담는다. 존댓말도 동사에서 나타나고 예의를 갖추는 표현이나 뉘앙스들이 동사에서 변화구를 만난다. 길을 가다 낯선 이에게 '안녕하세요'를 하지 않고, '저기요'라고 문장을 시작해도 동사의 어미나 말투, 표정 등에서 격식이 갖춰져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프랑스어의 동사도 이런 의미에서 매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봉주르'라고 인사를 먼저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사를 하지 않고, 길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인사 없이 병원 창구에 서서 약을 받고, '봉주르'를 빼먹고 가게에서 계산을 하는 것은 무례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여지를 만든다. '봉주르'가 무거워지는 순간이다. 인사를 빼먹었다면서 인사부터 하라고 대놓고 요구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의외로 불쾌함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불쾌함은 말투나 그들의 작은 제스처에서 나온다. 상대가 유독 큰소리로 딱딱하게 '봉주르'를 할 때는, 내가 인사를 빼먹었다는 것을 콕 짚어주기 위함일 때가 있다.


프랑스의 이런 인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 사람들은, 불어가 짧아 혹시나 말실수를 할까 봐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봉주르'를 잃는 것보다 차라리 상냥한 미소를 잃어버리라고 말해주고 싶을 때가 다. '봉주르'로 시작하지 못한 대화에는 차가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걸 모른 채 상냥한 미소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친절함을 표현한 외국인은 답으로 돌아오는 상대의 차가움을 무례함, 때로는 인종차별로 읽는다. 앞사람과 뒷사람에게는 상냥했던 사람이 자신에게는 상냥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인종 차별이나 여러 다른 이유로 그럴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의외로 '봉주르'의 부재는 강력하다. 미소를 띠고 상냥하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사 하나 하지 않았다고 벌어지는 기분 나쁜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어쩌겠나.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는데.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도 문화와 관습이 달라서 아니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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