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내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입학하면서 어머니는 두정동 공단에 있는 작은 공장에 들어가셨다. 경제적으로 결코 넉넉지 않았던 상황에서 나를 비롯한 두 명의 동생들이 차례로 학교에 입학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다시 공장 근로자가 되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화학 소재의 접합 작업을 하셨다고 했다. 플라스틱과 섬유를 특수한 본드를 활용해서 접합하는 업무로, 오전 8시 30분부터 시작하여 저녁 5시 30분까지 계속 반복하는, 단순하지만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하루종일 본드 냄새를 맡아야 하기에 머리도 아프고 속도 좋지 않은 그런, 지금으로 말하면 3D 업무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우리들에게 아침밥과 옷을 챙겨주시고 항상 7시 30분쯤 집을 나섰다. 공장까지는 포장이 되지 않은 농로를 3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울퉁불퉁 흙과 자갈로 만들어진 길이었기에 자동차는 다닐 수 없었고 오직 경운기와 우마차만 다닐 수 있는 그런 길. 때문에 비가 오는 날에는 어머니의 신발이 항상 진흙으로 엉망이 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항상 어머니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그 길로 달려 나갔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였다. 6시 즈음에 어머니가 오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마중을 나갔다. 나 혼자 갈 때도 있었고, 어린 동생들의 손을 잡고 갈 때도 있었다. 마을 입구쯤 걸어 나가면 저 멀리서 걸어오시는 어머니를 금방 확인하고 달려가서 맞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안아주셨다. 회사 일로 많이 힘드실 것 같았지만 우리를 보면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셨다. 함께 일을 다니시는 동네 아주머니분들도 이런 우리들에게 효자, 효녀라며 칭찬을 아껴주지 않으셨다. 나는 그렇게 칭찬받는 것이 좋았고, 우리를 반겨주시는 어머니의 웃는 모습이 좋아서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엄마 마중을 나갔다.
어머니는 가끔 야근도 하셨다. 야근을 하시면 밤 9시에 끝나셨다. 밤 9시. 시골 마을은 정말 깜깜하고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어머니가 오는 길에는 작은 산이 있었고, 무덤도 몇 개 있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시골의 밤길. 다행히 동네 아주머니 1~2명이 같이 공장을 다니면서 함께 걸어오실 수 있었지만,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그 길을 걸어온다는 것은 상당한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아버지와 함께 야근하고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마중 나갔다. 환하게 빛나는 손전등을 들고 아버지가 함께 어머니를 마중 갔고, 우리 불빛을 본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내 이름을 반갑게 부르기도 하셨다. 때로는 아버지 혼자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 공장 앞으로 가서 어머니를 태워오시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몇 년 후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어머니 일행을 따라오는 일이 생겼다고 했다. 어머니 일행은 모든 힘을 다해서 앞만 보고 달렸다고 했다. 그 당시 인신매매가 전국에 성행했던 시기라서 더더욱 무서웠다고 했다. 그렇게 전력으로 달리셔서 어머니 일행은 마을 입구로 들어왔고 바로 앞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셔서 무사히 위기를 모면했다고도 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서 나는 초등학생을 넘어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야근날이면 손전등을 들고 저 멀리 공단 가는 길로 마중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