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그날, 어머니의 뒷모습
눈 오는 밤, 그리고 막차 이야기
그날도 눈이 내렸다.
6학년 겨울방학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12월. 하늘에서는 펑펑 함박눈이 내렸고 기온도 살짝 내려간 겨울 어느 날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려던 나에게 짝꿍 녀석이 물었다. "오늘 우리 집 가서 보드 게임하고 갈래?"라며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친구를 따라서 학교 근처의 짝꿍 집으로 향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근사한 빌라 건물. 화려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친구 어머니가 나를 나를 맞아주셨다. 친구 방으로 들어가니 멋진 책상과 책장, 장난감 서랍들과 게임들이 가득했다. 내겐 신세계였다. 친구 어머니가 깎아주신 맛있는 과일을 먹으며, 그 녀석 방에서 열심히 보드게임을 즐겼다.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게임을 즐겼다. 이미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나는 보드게임에 빠져있었다. 시간은 이미 저녁 6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집에 계신 할머니가 걱정을 하실까 봐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집에 계시지 않았는지 전화 통화를 하지 못했다. 빨리 집으로 가야 했지만 친구 어머니가 권하시는 저녁까지 함께 먹고 밤 7시가 조금 넘어서 친구집을 나섰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미끌미끌한 길을 걸어서 조심조심 학교 앞의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저녁 7시 40분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눈이 와서 그런지 정류장은 평소와는 다르게 한산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은 서너 명 정도가 전부였다. 오직 나만이 학생이었다. 우리 동네로 가는 분도 없는 듯했다. 버스 정류장에 붙은 종이 시간표를 보니 우리 집으로 향하는 버스는 단 2대가 남아있는 상황. 저녁 8시와 8시 50분 차가 남아있었다. 집에 전화를 하지 못해서 걱정이 되었지만 8시 차를 타고 가면 별 문제가 없을 듯했다. 하지만 눈이 복병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밤 8시 정각. 8시 10분, 20분이 되어도 차가 오지 않았다. 밤 8시 30분이 승객들 대부분이 버스를 타고 사라지고 버스 정류장에는 오직 나만이 남게 되었다. 눈 때문에 8시 버스를 운행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점점 걱정이 커졌다. 만약 남은 막차가 오지 않는다면 불빛이 없는 눈 쌓인 시골길을 1시간 정도 걸어가야 했고, 가는 길에는 공동묘지들이 가득한 장고개도 지나야 했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날씨도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나는 저 멀리에서 큰 버스가 나타나기만을 기도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뒤 쪽에서 들렸다. 자세히 보니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우리 집 방향에서 손전등을 들고 혼자서 눈길을 걸어오고 계셨다. 나를 알아보셨는지 어머니는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크게 화를 내시고 있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집에 전화도 하지 않고 눈 오는 날에 밤 8시까지 들어오지 않았던 나의 잘못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거센 숨을 몰아서며 내 앞에 서 계셨다. 정류장에 혼자 서 있는 나를 크게 꾸짖으셨다.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오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앞에 버스가 조용히 정차했고, 앞문이 열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곧장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버스 문이 닫히고 버스는 출발을 했다. 어머니는 버스에 타지 않고 그대로 서 계셨다. 나는 버스 창문밖으로 멀어져가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평생 잊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다). 나는 뭔가 상황이 이상한 것을 느꼈지만 당장 버스에서 내릴 용기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다시 그 눈 내리는 어두운 시골길을 걸어오셨다. 아들 걱정이 되어서 공장 근무를 마친 후에 눈 내리는 밤길을 홀로 걸어서 학교 앞 정류장까지 오셨고, 다시 혼자서 되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버리고 혼자 버스를 타고 훌쩍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너무나 죄송했다.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시간 후에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다음부터 늦으면 꼭 연락하라"는 한 마디만을 남기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가장 후회스러웠던 장면 중에 하나다.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버스를 타지 않고 어머니 손을 잡고 같이 걸어왔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바로 버스에서 내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어머니는 그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하시는데, 나는 아직도 그날의 선택이 너무나 후회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