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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ynn Nov 17. 2024

내 생애 치욕의 날

초등학교 여자 친구들의 방문

1988년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그 해 여름은 9월에 있을 서울올림픽 준비로 나라 전체가 정신이 없었고 전국이 개발 붐이었다. 천안 시내도 5단지, 6단지 등 새로운 아파트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그 당시 새롭게 만들어지는 아파트인 6단지는 나의 통학길 바로 옆에서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과와 배나무 가득한 과수원을 밀어버리고 아파트가 만들어졌고, 그 옆의 냄새나는 천안시 공동 쓰레기장은 흙으로 메꿔지고 있었다. 우리 동네로 이어지는 장고개 앞까지 길이 포장되고 반듯반듯한 도시 구획으로 나눠지고 있었고, 버스 노선도 새로운 아파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마냥 먼 시골마을로 느껴졌던 우리 동네가 이제는 도시 바로 옆의 작은 시골 마을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면서 베일에 감춰져 있던 우리 마을에 대한 학교 친구들의 호기심이 늘어나고 있었다. 말우물이 어떤 곳인지 묻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심지어는 한 녀석이 우리 집을 찾아오고 싶다고도 했다. 나는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에, 아직까지 아궁이와 장작을 쓰는 우리 집이 초라해 보였고, 화장실 또한 밖에 있는 시골의 푸세식(?)이었기에 친구의 방문을 강하게 부정했다. 아직까지 학교에서 우리 마을에 온 것은 가끔 찾아오는 선생님들이 전부였다. 선생님들도 가정 방문 때문에 저학년 때나 한두 번 찾아오고 3학년때부터는 거리가 멀다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마을에 친구들이 오면 동네 환경을 깜짝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1학기가 흘렀다.


다시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참으로 더운 여름이었다. 우리 마을에는 계곡이 없었기에 여름에는 붉은색 게통의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 넣고 목욕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8월의 어느날, 어른들은 공장과 밭에 가시고, 여동생들도  친구들을 만나러 집에 없었기에 나 홀로 큰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서 목욕을 준비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들어올지 모르니 대문을 잠궜다. 그리고 옷을 벗은 후에 대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열심히 를 밀고 있는 순간, 어딘가에서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곳을 향해보니 담틈으로 벌려진 공간이었다.

깜짝 놀라고 당황해서 나는 "누구야!"라고 크게 외쳤다.

곧바로 "우리야"라고  밖에서 익에 익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우리 반 여자 친구들이었다. 두세 명의 목소리. 그 친구들이 왜 여기에.

담 밖에서 또 한 명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마을에 사는 같은 반 동갑내기 여자 친구였다.

"방학이라서 친구들을 우리 집에 초대했는데, 너의 집이 어딘지 궁금하다고 해서 들렸어"


같은 반에 있던 동네 여자 친구 하나가 친구들을 자기 집에 초대했고, 가는 길에 우리 집을 살포시 훔쳐봤는데 하필이면 그때 내가 목욕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더 이상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서 대야 안으로 몸을 움추렸다. 여전히 밖에는 깔깔대는 그 녀석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잠시 후에 "우리 이제 갈 테니까 나와도 돼" 라며 여자 친구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본 것인지 너무나 부끄러웠다. 왜 친구들을 초대해서 우리 집까지 온 것인지. 정말 화가 나고 황당했다. 친구들이 간 후에 나는 대야 밖으로 후다닥 나와서 대청마루에서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갔다. 창피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다시 그 친구들을 만난 것은 개학날이었다. 내 앞에서 살짝 웃음을 지어 보이고 나를 볼 때마다 웃음을 터뜨리는 그 친구들. 당시 내성적인 나였기에 결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얼굴만 빨개질 뿐.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이 내 생애 최악의 수치일이자, 기억에 남는 행복한 하루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순결한 몸을 여자친구들이 훔쳐봤지만, 나 또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기에. 어찌 되었건 그날  이후, 우리 마을에도 친구들이 한두 명씩 찾아오게 되었고, 나도 생애 처음으로 친구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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