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과목은 체육이었다. 왜소한 체구였기에 체력도 약했고, 운동 신경도 없었다. 선천적으로 부족했기에 후천적으로 노력하고 싶었지만 나의 환경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함께 축구나 농구 시합을 하고 싶어도 마을에는 넓은 공터나 운동장이 전혀 없었다. 작은 마당 서너 개가 전부였다. 방과 후에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야구나 축구를 즐기고 싶었지만,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를 타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에 학교에 오래 남을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운동과 친해질 시간이 없었다. 그 결과 초등학교 4학년 최종 통지표에서 체육과목은 수우미양가 중 '양'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받았다. 모든 과목이 '수'였지만, 체육만이 오롯이 '양'이라는 결과. 때문에 나는 4학년 우등상을 놓쳤다.
1987년, 다시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다. 5학년 7반.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서울에서 오신 멋진 남자선생님이었다. 무섭지만 상당히 냉철하고 정의감 불타는 선생님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매일매일 서울에서 천안으로 출퇴근을 하신다는 것. 그 부지런함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셨다는 것. 선생님은 시골에서 도시로 통학하는 아이라고 나에게 많은 것을 챙겨주셨다. 공짜로 문제집도 주시고, 가끔씩은 공책도 선물해 주셨다. 그 덕분에 나의 성적도 쑥쑥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체육 과목이었다. 체육만 잘하면 1학기 정말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먼저 체육 이론 시험이 있었다. 만족할만한 성적이 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체육 실기 시험. 선생님은 6월 22일에서 26일 사이에 날씨가 좋은 날에 실기평가를 한다고 아이들에게 공지를 했다.
이윽고 6월 22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운명의 6월 마지막 주를 맞이했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얻고 싶었다. 22일 아침 선생님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뭔가 고민이 많은 듯했다. 계속 신문만 읽고 계시고, 별 얘기가 없었다. 그리고 23일도, 24일도, 25일도, 26일도. 선생님은 체육 실기 시험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셨다. 우리반은 자습이 잦았고 선생님은 신문만 읽고 한숨만 가득 쉬고 계셨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정말 고민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결국 6월이 지나갔다. 7월 첫 주에 체육 실시 시험을 치르지 않고 최종 성적표가 나왔다. 체육 과목 성적이 93점. 헉!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대 이상의 점수였다. 작년에는 '양'을 받았지만, 이번 학기에는 '수'를 받은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체육 실기시험을 하지 않고 이론만으로 좋은 성적을 주신 선생님이 너무나 고마웠다. 덕분에 나는 5학년 때는 개근상과 함께 우등상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을까?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때 왜 선생님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시점이 6월 민주항쟁 시점이었던 것이다.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서 전 국민이 6월 10일부터 대규모 투쟁을 했고, 체육 실시 시험이 있을 즈음에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이용하여 다시 민주항쟁을 진압하려고 했다. 다행히 미국의 압력과 군부의 반대로 인해 광주에서 일어났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계자인 노태우가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선언하면서 민주 항쟁은 국민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그 1주일이 우리나라 민주화의 큰 갈림길이었다.
서울에서 출퇴근하시는 선생님은 6월 항쟁의 중심인 서울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고,
한 명의 지식인으로서 고민하셨던 것이었다. 그래서 체육 실기시험은 생각지도 못했던 듯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1987년 6월의 마지막 주,
교탁에 기대어 창 너머의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나의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그 표정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