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의 작은 에피소드들
나는 운이 좋았다. TMO 특기를 받고 두계역으로 배치된 것을 시작으로 그 이후에도 행운은 계속 이어졌다. 배치를 받고 6개월이 지나자 육해공군의 선임들 6명이 차례로 제대를 한 것이었다. 98년 초가 되자 나는 TMO에서 No.2가 되었다. 바로 위에 있던 해군 고참도 나와 관계가 좋았기에 둘이 함께 장기 집권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순한 성격이었기에 우리 부대에서는 폭력과 얼차려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TMO 일도 나름 재미있었다. 우리의 역할은 서울 국방부와 계룡대를 오가는 주요 장성과 장교들의 의전과 열차표 지원이었다. 공군본부에서 하루에 200여 통의 전화를 받으며 기차표 지원을 했고, 주말이면 군 수뇌부들의 가족까지 지원하는 일이 내 역할이었다. 덕분에 계룡대에 있는 공군 수뇌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참모총장님부터 참모부장들이 기차로 이동할 때는 그분들 의전을 챙겼다. 더운 복날이면 공군참모총장님께서 직접 우리 공군파견관에게 삼계탕을 사 먹으라고 금일봉을 주시기도 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병 신분이었지만 수많은 별들을 군생활하면서 볼 수 있었고 가까이에서 의전을 챙길 수 있었다.
특히 토요일 오후에는 주중에 계룡대에서 일하다가 서울로 향하는 군인이나 군무원들을 위해서 주말 열차를 운행했는데, 그 열차 운행이 끝나면 TMO에는 평온함이 밀려왔다. 주말 오후에는 당직자를 제외한 대부분이 탁구를 치거나 체력 단련을 했고, 후임들은 기타를 치며 노래 연습을 하기도 했다. 선임인 나는 내무반에서 밀린 낮잠이나 TV를 보며 주말 오후를 보냈다. 가장 좋은 것은 기차와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대학시절 여행이 취미였던 나에게는 기차가 희망의 상징이었다. 웅장한 디젤 기관차 소리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역무원들과 함께 얘기를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제대를 얼마 남지 않았던 1999년 5월, 내게도 시련이 닥쳤다. 계기는 육해공군 다른 군복무 기간이 만든 레임덕 때문이었다. 당시 육군은 26개월. 공군은 30개월 복무를 해야 했다. 나의 바로 아래 육군 후임이 있었는데 나와의 차이는 단 한 달 반. 나는 11월 제대였지만, 그 녀석은 9월 제대였다. 나보다 2달 반정도 빠르게 제대하는 상황이었다. 사회에서 주먹 좀 썼다는 그 녀석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통제 밖에서 후임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하루는 새벽녘에 1층 사무실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며 나를 불렀다. 내려가보니 그 녀석이 세 명의 후임병들을 구타했던 것. 그 녀석이 술에 취해서 발생한 듯했다. 나는 "뭐 하는 짓이야"라며 큰 소리를 치며 그 녀석을 나무랐다. 그 녀석은 짜증 난 듯이 크게 욕 한 마디를 외치며 다시 내부반으로 올라갔다. 현장에는 부엌에서 쓰던 칼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구타를 당한 중간 후임 녀석이 화가 나서 들고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일찍 발견이 돼서 큰 사고는 막은 듯했다.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아침에 돼서 간부들이 출근했고 나는 보고를 했지만 결과는 구두 경고. 판을 크게 키울 수 없다며 TMO장은 그 녀석에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며 경고만을 했다.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날 일어났다. 어제 일로 후임들은 모두 자리를 피했지만 대신 그 녀석은 철도이동대 본부에서 출장온 운전병 선배와 밤새 술을 마셨던 것. 문제는 술에 만취한 그 녀석이 공군 파견관 책상 위에 있던 자동차 키를 가지고 새벽에 몰래 나갔던 것이었다. 같이 술을 마시던 운전병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차를 타고 사라졌고, 새벽 5시쯤에 인근의 배수로에서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내무반에서 자고 있던 모두가 그곳으로 달려갔다. 천만다행으로 인명 사고는 없었다. 다만 공군 파견관의 승용차 앞부분이 완전히 부서진 것. 그 녀석은 술에 취해서 차 안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결국 다음날 그 녀석은 바로 영창(군대감옥)에 갔다. 우리 TMO도 신뢰를 잃고 철도이동관리대 본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밤마다 당직사관이 수화기를 바꿔가며 인원 체크를 했고, 우리의 자유시간도 대부분 사라졌다. 금주령이 내려졌고 모든 것이 원칙대로 진행되었다. TMO장도 교체되었다. 최악 상황은 그 녀석이 영창 15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다는 것. 어처구니 없게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곳에서 모인 것이었다. 그때부터 TMO에서는 선후임병간의 대화가 사라져 버렸다. 거의 1달 반 정도 아무런 대화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기에. 그 녀석이 제대한 9월 이후에야 다시 예전을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찌 보면 그 당시 나는 처음으로 리더십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나의 부족함을 알았고, 좋은 게 좋은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조금만 훌륭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상황을 잘 해결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후회가 아직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