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 그리고 선생님
1999년 나의 마을이 사라져 버렸다. 제대를 하고 마을 입구에 도착해서 내가 본 것은 거대한 토목 공사 현장. 우리 마을은 온데간데없고 내가 살았던 시골집의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의 마을 '말우물'은 거대한 흙먼지가 가득 채우고 있었고, 굉음 소리를 내는 불도저와 대형 덤프트럭만이 오고 가고 있었다. 도시 개발을 위한 구획 정리가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군대에 있던 사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마을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시골집 한 채가 전부였던 우리 가족은 작은 보상금을 받고 인근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시골 마을이 사라지면서 아버지는 농사를 접고 매일같이 공사 현장으로 일을 하러 나가셨고 어머니도 새로 이사 온 아파트 길가에서 채소 노점상을 시작하셨다. 갓 군대를 제대한 나 역시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까지 학비를 받아쓸 수는 없었다. 나는 휴학을 결정했다. 1~2년 정도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당시 IMF로 인해 취업 시장도 얼어붙어 있었기에 내가 휴학하는 것을 아무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휴학을 결정한 후에 나는 일자리를 찾았다. 처음에는 작은 어린이 학습용품 회사에 지원했었다. 며칠간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해서 참여했는데 왠지 다단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정도 교육을 받다가 바로 빠져나왔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대형 마트 영업직. 이력서를 써서 까르푸와 메카 마트의 영업직 면접을 진행했다. 다행히 메가마트 의류팀은 합격을 했지만, 몇 년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솔직히 대학을 포기하고 몇 년 일할 자신이 없었다. 이곳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구인구직자들이 자주 이용하던 '교차로'와 ' 벼룩시장'을 다시 찾았다. 눈에 확 들어온 문구가 있었다. 보습 학원에서 과학 강사를 모집한다는 것. 대학생도 가능하다고 했다. 즉시 전화를 했고 바로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시범 수업을 해보라고 했고 다행히 합격. 나는 중고생을 가르치는 학원의 과학 강사가 되었다. 작은 학원이라서 학원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약 40명 정도. 나는 매주 18시간 정도 강의를 했다. 하루 3~4시간 정도였다. 다만 내가 막내였기에 강의실 청소며 뒷정리까지를 담당했다. 주말이나 시험기간에는 보강도 진행했다. 그리고 매달 80만 원에서 1백만 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제대 이후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월급을 받아서 너무나 행복했다. 나 스스로 용돈을 충당할 수 있었고, 적은 액수지만 저축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처음 다녔던 학원은 학원생들이 줄어들면서 아쉽게도 이듬해 6월 문을 닫게 되었다.
다시 백수가 될지 알았지만 함께 일했던 수학 선생님의 추천으로 지역에서 꽤 유명한 다른 학원으로 나는 이직하게 되었다. 급여는 거의 1.5배 수준으로 늘어났고 가르치는 학생수도 100명 이상으로 상당히 많아졌다. 틈틈이 과외 문의도 들어와서 잡수익도 생길 정도였다. 주변에서 나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난 듯했다. 통장 잔고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900만 원짜리 작은 소형차 한 대를 살짝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서 구매할 수도 있었다. 집 안에 최초로 자가용이 생기니 가족 모두가 축제 분위기. 우리도 뭔가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5명이 타기에는 조금은 작지만 자동차를 타고 강원도로 첫 가족 드라이브라는 것을 떠날 수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만들어낸 경제적인 성취였다. 이제 나도 제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1년이 되면서 다시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복학을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학원강사로 남을 것인가? 솔직히 돈을 더 벌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우선 학교에 복귀를 해서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 그게 우선이라고. 나는 고민에 고민을 이어갔다. 1년 정도 더 휴학을 해도 나쁘지 않을 듯했지만, 그렇게 되면 대학 친구들과도 만날 수 없고, 다시 복학하는 것도 힘들 듯했다. 대학생활도 내게 큰 의미가 있었기에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2001년 새 학기에 복학을 결정하기로 했다.
학원의 원장님께 복학 소식을 전하니 상당히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좋은 인재를 떠나보내는 심정이라고 하시면서 내게 이런 말을 건네주셨다. "어디 가서든 굶어 죽지 않을 성격이니까, 무슨 일을 하든 잘할 거야. 복학해서 대학공부 열심히 하고 꼭 성공하라고!" 그리고 퇴직금이라며 급여와 함께 100만 원을 더 봉투에 넣어주셨다. 순간 살포시 눈물이 나왔다. 챙겨주셔서 고맙고, 한 편으로는 또 미안했다. 2월의 어느 날 선생님들과, 그리고 제자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는 조용히 정들었던 학원을 나왔다. 어찌보면 비공식적인 내 생애 첫 직장인 보습학원에서의 첫 퇴직이었다. 2001년 3월, 군입대로 떠났던 대학으로 돌아왔다. 3학년 복학생으로 다시 캠퍼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