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찍 잠에서 깨어 조용히 호수가를 걸었다. 이른 아침 테카포 호수에는 물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었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만 들릴 뿐, 테카포 호수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테카포 호수의 아침
고요한 호수가에서 발자국 소리만을 남기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테카포의 곁을 걸었다. 오늘 하루는 이렇게 아침 테카포 호수 산책으로 시작되었다.
다시 캠핑장으로 돌아오니 아침 일찍 많은 사람들이 짐을 챙겨서 떠나고 있었다. 우리도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신 후에 다음 목적지로 떠날 준비를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푸카키 호수 (Lake Pukaki)를 지나서 아오라키 마운트 쿡(Aoraki/Mt. cook) 국립공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뉴질랜드 트래킹의 최고로 꼽히는 후커 밸리 (Hooker valley) 트랙을 걷고 내려오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었다.
오전 10시쯤 첫 번째 캠핑 사이트였던 테카포 홀리데이 파크를 떠나서 우리 가족은 캠퍼밴을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30분 정도를 정신없이 달려오니 눈앞에 거대한 호수 하나가 나타났다. 물속에 푸른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밀키 블루색의 푸카키 호수였다.
푸카키 호수와 마운틴 쿡
푸카키 호수와 마운틴 쿡
호수 전망대에 잠시 차를 세우고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푸카키 호수를 바라봤다. 푸카키 호수는 하늘 아래 첫 번째 물이라는 뜻으로, 아오라키 마운트 쿡에서흘러내린 빙하수가 고여서 만들어진 빙하호수였다. 그리고 푸카키 호수 너머로 만년설이 가득한 마운트 쿡의 모습도 저 멀리 들어왔다. 50km 이상 떨어진 산이었지만, 맑은 날씨로 인해 그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호수의 물을 만져보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호수가로 내려왔다. 생각대로 차가운 호수 물. 잠시 아이와 함께 물제비 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다시 차에 올라서 마운트 쿡으로 열심히 달렸다.
푸카키 호수가로 이어진 멋진 풍광의 길을 따라서 1시간을 더 달렸다. 이윽고 거대한 만년설이 보이는 마운트 쿡 국립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커 밸리 트래킹을 위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탐방 준비를 했다. 후커 밸리 코스는 약 10km의 거리로 약 3시간 정도 걸리는 산행길이었기에 우선은 넉넉히 먹고 떠나는 것이 중요했다. 캠퍼밴에서 물을 끓여서 컵라면을 먹고 우리 가족은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후커밸리 입구와 등산로 설명
후커밸리 입구에서 4년 전 그날이 생각났다. 그때도 이곳에 왔지만, 폭설로 인해서 입구가 통제되어서 후커 밸리 트래킹은 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키포인트에 들러서 뮬러 호수를 둘러보고 아쉽게 일정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쉬움을 드디어 오늘 풀 수 있었다.다시 찾은 보람이 있어서 너무나 뿌듯했다. 탐방로 입구에는 오전부터 몰린 각국의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등산복부터 트레이닝복, 평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주차장을 가득 채웠다. 이곳이 뉴질랜드 최고의 관광지임을 실감살 수 있었다. 트래킹을 시작하려니 왼쪽의 웅장한 세프턴 산(Mt. Sefton)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프턴 산
세프턴 산은 마운트 쿡 빌리지에서 왼쪽에 보이는 설산으로, 마운트 쿡으로 착각할 만큼 그 웅장함이 대단했다. 후커 밸리 트랙은 세프턴 산의 앞쪽에 생성된 뮬러 빙하 호수를 지나서 빙하가 만든 계곡을 따라서 후커 호수까지 걸어가는 코스였다. 빙하로 생성된 거대한 U자 계곡을 걸으면서 만년설이 있는 마운트 쿡을 비롯하여 2개의 빙하호수와 빙하 계곡, 그리고 3개의 다리를 경험할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후버 트래킹 코스였다. 시작부터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기온은 20도 정도로 따뜻해서 산행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다만 햇살이 너무나 뜨거워 자외선 노출에 조심해야 했다. 길은 경사도 없이 평탄한 길의 연속이었다.
뮬러 호수
후커밸리 트랙 1번 다리
아이와 함께 탐방로를 걸었다. 어떤 풍경이 나올지 설렘도 있었고 기대도 되었다. 첫 번째 감탄사는 첫 번째 다리 입구였다. 1번 다리까지는 약 15분 정도 걸리는데, 여기서는 산 속 신비스러운 뮬러 호수를 볼 수 있었다. 돌과 회색의 빙하수로 가득한 뮬러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트랙의 1번 다리는 뮬러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빙하 계곡 사이를 지났다. 거친 바람이 불 때마다 아찔하게 흔들렸고 눈이 많이 오거나 바람이 심하면 이곳부터 통제가 된다고 했다. 조심조심 1번 다리를 지나서 2번 다리까지는 큰 협곡을 지났다. 양쪽으로 웅장하게 뻗는 산 사이를 아이 손을 잡고 열심히 걸었다.
아찔한 2번 다리
서서히 얼굴을 보인 마운트 쿡
잠시 후 거센 물소리가 들려왔다. 2번 다리 밑을 지나는 계곡에서 나는 물소리였다. 마치 폭포처럼 어마어마한 수량이 계곡 아래를 흘러가고 있었다. 2번 다리는 1번 다리보다 더욱 긴 흔들다리로, 아래를 보는 순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스릴이 넘치는 다리였다. 역시 한 번에 20명 정도만 걸어갈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오는 길에 여기서 강풍을 만났는데 롤러코스터만큼의 스릴이 느껴질 정도로 아찔한 산악 다리였다. 2번 다리를 지나게 되면서 서서히 정면으로 마운트 쿡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산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는 3,724m다. 산 위에 하얀색 만년설이 가득한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마운트 쿡과 주변 풍광을 즐기면서 긴 협곡을 약 40분 이상 걸었다.
마지막 관문 3번 다리
후커 호수로 가는 트래킹 마지막 구간
저 멀리 3번 다리가 나왔다.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이 느껴젰다. 그 다리를 지나서 약 10분 정도를 더 걸으니 후커 밸리 트래킹의 종착점인 후커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도 완전히 지쳐가고 있었고, 우리도 빨리 반환점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가득했다. 별 기대 없이 후커 호수에 도착하는 순간 우리는 믿을 수가 없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후커 호수 빙하와 유빙들
작은 유빙 조각의 첫 추억
바로 '빙하'였다. 수십 개의 빙하 조각이 호수 위에 떠 있는 것이었다. 그 유빙의 크기 또한 실로 어마어마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호수가로 내려갔다. 빙하가 호수에 떠 있는 유빙을 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 있었다. 수십만 년 된 빙하를 만져보다니 우리 모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후커 밸리에서 만난 만년설과 빙하는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 수만년 전의 얼음 속 역사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뉴질랜드는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기에 수많은 유빙들이 빙하에서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빙하를 바라보면서 간식으로 준비했던 바나나와 음료수를 마시고 우리는 사진 몇 장을 남긴 후에 다시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서 내려왔다.
푸카키 호수를 보며 돌아오는 길
내려오는 길의 풍경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번에는 세프턴산과 계곡들 사이로 멀리 푸카키 호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에는 빙하가 만들어낸 작은 계곡과 샘물들도 있었다. 왕복 2만보를 걸으며 후커 밸리 트래킹을 마쳤다. 모든 것이 평생 잊지 못할 광경들이었다. 이곳에 찾았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고, 자연이 준 선물에 너무나 감사했다.
후커밸리 트래킹을 마치고 우리는 트위젤를 지나서 오늘의 캠핑 장소인 오마라마 탑 10 홀리데이 파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