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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레이드 걸 May 05. 2022

레트로풍 크리스마스 버터케이크

때는 바야흐로 80년대였다.

생크림 케이크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래 어쩌면 존재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동네 빵집 케이크 진열장에서 그런 걸 본 기억은 없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종로에서 제법 큰 인쇄소의 2교대 생산직으로 근무하고 계셨다.

당시에도 제법 직원 복지라는 개념이 있었던 그 회사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지금은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어떤 브랜드의 홀케이크를 전 직원에게 지급하곤 했다.


덕분에 매년 12월 25일 새벽이면 여느 때와 달리 일찍 눈을  나와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이불속에서 꼬물대며 아버지가 귀가하기만을 기다렸다.


사실 우리는 느끼한 버터크림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엄마가 만들어준 매콤한 오징어찌개와 달짝지근한 연근조림을 좋아하던 한식파였지만 당시의 케이크라는 것은 누군가의 생일에만 겨우 한 조각 맛볼 수 있는 레어템이었다.

요즘에야 동네 카페는 물론이거니와 슬리퍼를 끌고 간 심야의 편의점에서조차 제법 그럴싸한 조각 케이크와 티라미수 따위를 구경할 수 있지만.


이른 시간이라 TV에서는 재미없는 뉴스들뿐이었다.

모든 채널의 숫자를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무언가 볼만한 프로그램을 찾느라 레버(버튼식이 아니다)를 줄기차게 돌리곤 했다.

슬슬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질 즈음이면 마침내 아버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우리 자매는 내복 바람으로 뛰쳐나가 인사도 잊은 채 잉크 냄새가 풍기는 거친 손에서 케이크 상자를 낚아채서는 모닥불 앞의 인디언 꼬마처럼 춤을 추었다.


허기진 아버지가 반쯤 감긴 눈으로 아침상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그 옆에서 밥 대신 케이크를 잘라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입이 짧아 두 조각 이상은 먹지도 못하고 식어가는 국물에 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먹는 것으로 후식과 메인디쉬순서가 뒤바뀐 기묘한 조식을 마치곤 했다.


아버지가 주무시고 나면 우리는 그제야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간밤에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갔다고 셈 치는 베개맡 양말 속에 들어있던 천 원짜리 지폐를 쥐고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가곤 했다.

미간에 주름까지 만들어가며 신중하게 매대의 과자를 스캔하고 동생이 고른 것과 품목이 겹치지 않도록 스마트하고도 효율적인 구매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드디어 시작된 크리스마스 특집 방송을 보며 그것들을 까먹기 시작하면 어느덧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비록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소확행 그 자체였던 나의 유년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이후 몇 번인가 이사를 다녔고 나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들인 시간에 비해 제법 좋은 성적이 나왔고 성실한 노력파인 동생은 나보다 월등히 잘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인망도 있어서 반장을 몇 번이고 맡았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아버지는 금요일이면 동네 시장 어귀의 과일가게에서 사과, 바나나, 자몽 같은 걸 잔뜩 사 오시곤 했다.

그리고 오락기를 사주는 대신 시장 건너편의 오락실에 데려가 주셨다.

한동안 토요일 저녁마다 나는 아버지와 오락실에서 백 원짜리 동전을 잔뜩 탕진하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돼지저금통에 넣으려고 모아두신 잔돈이었을 게다.


그리고 아버지는 월급날이나 엄마가 저녁밥을 차리기 싫어하는 날이면 동네 어귀에 있는 치킨집에서 매콤 달콤한 양념치킨 한 마리를 포장해 오셔서 저녁 반찬으로 먹었다.

케첩과 마요네즈를 섞었을 뿐인데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양배추 샐러드를 나는 마구 퍼먹었다.

어쩌면 치킨보다 그걸 더 좋아했던 거 같다.


내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공부 잘하고 얌전한 우리 자매는 분명 아버지의 자랑이었을 거다.

아버지에게는 그동안 사무직들이 독점해 온 대학생 자녀 대상 장학금을 생산직 직원 중 유일하게 수령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고로 손가락을 두 번이나 다치고 이명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는데도 아버지는 그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정말 자식이 웬수다.


한밤중에 날카롭게 울리던 전화벨 소리에 깨서 펑펑 울던 엄마의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병원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택시는 추석이면 할아버지 성묘를 위해 캄캄한 새벽에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 갈 때에만 탈 수 있는 고급 교통수단이었는데…

창밖으로 내다본 동그란 달이 기묘할 정도로 샛노랗게 보이는 바람에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았는데 엄마는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나를 흔들어 깨웠다.

역시 그다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린애라는 건 참 편하다.


이제는 뉴스에서 슈퍼문이 어쩌고 떠들어대는 날조차 달을 쳐다보지 않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마흔 하고도 중반인 딸에게 줄 간식을 꼭 챙겨 오신다.

아파트 단지 내 편의점에서 파는 빵, 동그란 비스킷, 알록달록 색소가 예쁘게 들어간 탄산음료, 은박지에 싼 야채 김밥, 강원도에 계신 아버지 친구분께서 철마다 보내주시는 흙이 잔뜩 묻은 유기농 고구마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꿈에도 모르시겠지.

싸구려 버터크림으로 범벅된 공산품 케이크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하던 어린 딸이 직장 건강검진에서 당뇨 경고를 받은 이후로 매달 25일의 급여일을 기다려 인스타에서 좋아요♥를 잔뜩 받는 가게의 값비싼 디저트를 골라 사 먹는 철부지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언제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밤새도록 인쇄 기계 소음에 시달린 아버지가 덜컹거리는 전철에서 케이크 상자를 소중히 품에 껴안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쪽이 찌르르해진다.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외출이 잦은 엄마에 비해 내성적인 아버지는 집에서 노견 두 마리를 챙기며 하루를 보내신다.

당뇨가 꽤 진행되어 작년부터 인슐린을 맞으시지만 곁에서 살뜰하게 챙겨드리지 못하는 탓에 드시고 싶은 게 있냐고 늘 묻지만 한사코 없다고 하신다.


이번 휴일에는 아버지의 최애 반찬인 딸내미 표 계란말이를 잔뜩 만들어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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