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셔레이드 걸 Apr 08. 2023

광대와 촛불이 친구가 되기까지 10년

그리고 또 15년

나에게는 25년 지기 친구가 있다.

누군가의 20대, 30대, 40대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다.


사실 그 친구는 친구였으나 친구라고 부르기에 다소 어려운 존재였다.

친구와 나는 생김새, 눈빛, 말투, 행동조차 너무나 달랐다.

친구는 우아하며 고요한 달빛을 닮았고 나는 양손으로 저글링을 하며 깔깔 웃어대는 어릿광대 같았다.

그런 우리 둘이 친구라고 하면 주변의 모두가 의아해했다.

너희 둘이 어떻게 친구냐고.

그렇다.

배트맨과 텔레토비가 절친이 되어 꼬꼬마 동산에서 각각 배트카와 씽씽카를 타고 레이싱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면 아주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각설하고.


97년 봄, 수십 명의 동기들 중에 마음이 맞는 다섯 명의 친구들이 만나 주먹밥처럼 똘똘 뭉쳐 다녔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찢어져있는 각자의 집에 가서 먹고 자고 가족들과 안면을 트고 지냈다.

서로의 대학 졸업식에 쫓아다니고 아무리 바빠도 생일 주간에는 만나서 밥을 먹고 꼭 십 년은 못 만난 사람들처럼 매번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제일 먼저 결혼과 출산 스타트를 끊은 친구와 서서히 연락이 뜸해지면서 어느샌가 넷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곧 한 명, 또 한 명 각자의 길로 가다 보니 결국 무한도전의 정형돈과 하하처럼 단체로는 친한데 단둘은 왠지 어색한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같은 모임에서조차 그 친구의 지인, 내 지인은 교집합이 0에 수렴하는 지경이었을 정도로 우리 둘은 성향이 달랐고 내키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유행 중인 MBTI를 예시로 들자면 친구는 INTJ, 나는 ENFP의 아이콘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친구가 꾸준히 연락을 해주어 만나고 나는 직장에서 일을 소개해주고 이런저런 연결점이 늘어나다 보니 30대부터는 그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가까워지고 독대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친구가 생각보다 허술하고 엉뚱하며 유머감각이 출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친구는 내가 생각만큼 해맑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레벨업을 거듭해 조금씩 조금씩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약속을 정해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고 생일을 챙기고 조카와 강아지의 안부를 묻는다.

짧은 여행을 떠나고 호캉스와 조식을 즐기기도 했다.


사람 만나는 일에 소극적이고 게으른 나에 비해 살뜰하며 세심하게 나를 챙기는 친구가 좋았다.

객관적으로 똑똑하기도 했지만 현명하고 지혜로운 깊은 통찰력에 더 감탄했고 예의 바르지만 단호한 태도가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입버릇처럼 나는 이런 친구가 있다-고 자랑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렇게 어느덧 15년이 더 흘렀다.

이따금,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스스로 길고 좁다란 동굴에 들어갔을 때,

다시 길을 찾고 밖으로 나온 것은 아마도 그 친구가 곁에서 묵묵히 낮이고 밤이고 내게 등불을 비춰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단지 그것이 밝은 낮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촛불은 어두운 밤에 비로소 그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이전 08화 새 구두와 새빨간 발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