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셔레이드 걸 Jul 24. 2020

새 구두와 새빨간 발등

장마가 시작되기 전 어느 날의 기록

갑작스레 오후 출장이 잡혔다.

외부 회의가 소집됐고 전날 저녁, 부랴부랴 나의 유일한 포멀룩 세트-감색 슬랙스에 먹색 블라우스-를 옷장에서 꺼내 문고리에 걸어두었다.

아침에 현관에서, 맞다 신발은 어쩌지... 고민하다가 문득 얼마 전 새로 산 베이지색 슬링백 구두를 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주말에 있을 결혼식에 신으려고 했지만 뭐 어때- 하고 신발을 신고 나간 지 3분 만에 나는 처절하리만큼 후회했다.

뒤축이 끈으로 되어 있으니 불편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늘 몇 걸음 걷지 않았음에도 딱딱한 구두와 여린 발등 살이 맞닿은 곳이 금세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탄 뒤 언덕길에 있는 사무실로 어그적 어그적 걸어 올라가는 내 뒷모습은 실로 가관이었을 것이다.

책상에 앉아 구두를 휙 던지고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발바닥이 지잉지잉 울렸고 양쪽 엄지발가락에는 이미 쭈그러진 풍선 같은 물집이 잡혀있었다.

뒤꿈치가 벗겨질 걱정만 하고 앞쪽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출장을 마치고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 A를 만나기로 했는데 이 끔찍한 신발을 신고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엎어진 물.

발을 질질 끌며 겨우 마을버스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보니 마중 나온 친구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른 저녁 메뉴를 정하지 못해 잠시 망설이던 우리는 독일식 포크커틀렛과 감바스 파스타를 먹고 터질듯한 배를 두드리며 사무실로 향했다.

다시 걷기 시작하니 발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입가심으로 뭔가 마셔야 하지 않느냐며 친구에게 치댔고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잠시 시무룩해졌다.

그렇지만 A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탕비실에 가서 소화가 잘 되지 이것, 하며 메밀차를 두 컵이나 마시고 땅콩 캐러멜을 까먹고 발을 저는 와중에도 디저트랍시고 사온 블루베리 산딸기 커스터드 페스츄리... 까지 한 조각 잘라달라고 청했다.

점심을 삼각김밥으로 때웠다지만 내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많이 먹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두어 시간의 이야기를 마치고 A는 서쪽의 경기도로 나는 동북쪽의 경기도로 귀가를 서둘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 거지 같은 신발 다시는 신나 봐라!! 하며 집어던지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연신 발을 주물렀다.

어느덧 보라색으로 피멍이 들어버린 발등을 안쓰럽게 들여다보다 뒤꿈치를 만져보니 너무나 반들반들한 것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다시 신으면 길들일 수 있다.

실은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으니까 무척 잘 안다.

학생 시절, 유니폼을 입고 공연장 안내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공연관리팀에서 모두의 구두를 맞춰준 적이 있었다.

손에 굳은살이 잔뜩 박인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오셔서 열명남짓 여자아이들의 발을 종이에 그려가셨다.

얼마 뒤 이름이 적힌 구두상자들이 도착했고 얼핏 듣기로는 십만 원이 훌쩍 넘는 고급 수제화라는 소리에 두근거리며 발을 넣었지만 웬걸- 인어공주는 왕자를 찐으로 사랑했구나... 이 고통을 참고 춤 따위를 추다니, 나라면 왕자XX 정수리를 힐로 찍어버렸을 텐데..

다리를 절뚝이면서 <백조의 호수> 관람객을 안내하는 와중에 내내 중얼거렸다.

다음날 나는 원래 신던 투박한 검은구두로 몰래 바꿔 신었는데 며칠 못가 담당자 눈에 띄는 바람에 짜증나는 신발을 다시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프지 않았다.

아프긴커녕 이래서 수제 맞춤구두를 신는구나!! 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후 나는 졸업반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까지 발목 스트랩이 어여쁜 구두를 열심히 신고, 장내를 부지런히 걸어 다녔다.


그런 미담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슬링백 구두를 신고 나가는 것이 두렵다.

비싸게 사온 구두니까(사실 싸구려지만) 신으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없다.

조금 신다 보면 길이 들 거라는 다정한 조언에도 여전히 겁이 난다.

나아지겠지 괜찮아지겠지 익숙해지겠지-하며 견디는 거에 이제는 지쳤구나,로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굳이 안 해도 되는 일 앞에서 그냥 안 할래요-라고 말할 수 있는 나를 쓰담쓰담하고 싶다.

가끔은, 이따금씩, 종종-

너무 자주는 말고.


이전 07화 까만 밤, 깊은 고독, 심야 라디오의 불빛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