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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Aug 17. 2023

고흐를 만나러 간 오르세에서 방황했던 날

장소가 아닌 함께하는 시간에 힘주기!

파리에 하루 전 도착했지만, 기차가 중간에 멈추기도 하고 런던에서 예상치 못한 추위에 시달렸던 터라 몹시 피곤했는지 간신히 저녁만 먹고 모두가 깊은 잠을 자고 말았다. 호텔이 센강 주변이라 저녁에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긴장했던 몸은 도와주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빵을 사고 호텔에서 제공하는 커피를 받아 아침 식사를 가볍게 하고 일요일이라 성당에 갔다. 우연인지, 우리가 구한 숙소 주변에는 늘 성당이 근처에 있어 오가며 마음의 위안과 격려를 구하던 터였다. 성당에서 불어로 진행되는 미사를 드렸지만 천주교 미사 예식은 으레 비슷하여 불어로 미사를 보는 프랑스인들과 입을 맞춰 아멘! 아멘! 등의 기도는 따라 하며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가 미사를 봤던 성당에는 큰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는데 파이프 오르간으로 반주가 연주되고, 불어로 불려지는 성가는 그야말로 천상의 멜로디였다. 한 소 절도 따라 부를 수 없어도 음악의 아름다움은 어제 우리의 긴장을 단숨에 무장해제시켰다. 아침부터 안색이 좋지 않던 첫째도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 감탄하며 표정이 좀 나아져 보였다.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층고 높은 성당의 위엄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던 제대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아름다웠다.


 여행 초반기이면서도, 또 우리는 여행객이므로,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몸이 피곤하고 긴장이 풀어져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고흐의 그림이 있는 오르세는 오늘이 아니면 갈 시간이 안 날 것 같아 뮤지엄패스를 챙겨 오르세로 향했다. 걷는 시간이나,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이 비슷하여 산책할 겸 오르세를 걸어가기로 했는데, 아까부터 굳어 있던 큰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평소 미술관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고, 그림에 별 관심이 없는 아이이기에 눈치를 살피며 괜히 과장된 말투와 몸짓으로 흥을 돋우려 했지만, 아이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그런 큰 애와는 달리 둘째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화가 중에 고흐도 좋아하는 아이라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자화상을 보고 싶다며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고흐의 자화상은 출장가서 결국 보지는 못했다.) 성향이 다른 이 두 아들을 정녕 내가 낳았단 말인가. 하며 그래도 여행 와서 피곤할 텐데 내색 않고 엄마의 기분에 맞게 함께 흥겨워해 주는 둘째 아이가 내심 고마웠다. 그리고 모두 힘들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데, 꼭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눈치를 보게 만들어야 하는가 하며 큰애의 얼굴에 샐쭉대게 되었다.

 오르세에 도착해서 일층부터 관람하지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그림부터 감상하기 위해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조언해 준 것처럼 인상주의 화가들 전시실을 다 관람하고 이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다. 꼭대기 층으로 가서 고흐의 그림과 모네의 그림들이 있는 전시관까지 천천히 관람하며 들어가고 있는데, 계속 시큰둥하게 따라다니던 큰애가 급기야 자기는 몸이 좋지 않아 좀 앉아 있고 싶다고 했다. 다행히 전시실마다 중간에 소파나 의자가 놓여 있기는 했지만 많은 관람객 속에 혼자 앉아 있는 큰애가 내내 신경 쓰였다. 나와 작은 아이는 함께 그림을 감상하고 다른 전시실로 이동할 때가 되면 남편이 다음 전시실의 소파에 자리를 맡아 내가 큰 애를 이동시키는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도 편안하게 볼 수가 없었다. 결국은 고흐만 제대로 보고 나가자며 우리의 목표는 대폭 수정되었고 그렇게 고흐의 그림이 있던 전시실에 들어섰다. ‘별이 빛나는 밤에’가 있던 전시실은 그야말로 별이 빛나는 것처럼 그 그림만으로도 환하게 빛나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다. 아프다던 큰애도 그 순간에는 저 그림은 정말 멋지다며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제 좀 컨디션이 나아졌나 싶어 다음 전시실로 가려는 그 순간, 큰 애가 더 이상 있기 힘들다고,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다고 했다. 당연히 2층의 레스토랑도 가기 힘들어했다.

둘째에게 나의 핸드폰올 아예 주고 사진 찍고 싶은 작품을 담으라고 했다. 이건 왜 좋고 저건 왜 좋은지 나불대던 둘째의 목소리를 뒤로 앉아 있던 큰애가 내내 신경 쓰였던 관람이었다


그래 넌 정말 아프고 힘들어서 말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오늘이 파리에서 첫 일정인데, 엄마와 동생이 기대하던 미술관인데, 오는 내내 눈치 보게 만들더니 결국엔 끝까지 보지도 못하게 했다는 생각에 큰애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안 좋다면서도 나오던 길에 있던 기념품 샵에서는 그 누구보다 열정 있게 선물을 고르는 큰애를 보며 더 부아가 났다. 뾰로통해진 나의 모습에 큰애도 눈치가 보였는지, 자기 좀 나아졌으니 다시 구경하러 올라갈까 엄마?라고 물었지만 이미 전시실을 구경하고 싶은 의지가 일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여행에서 우리를 배려하지 않고 자기 컨디션대로만 하는 큰 애가 이기적인 것 같아, 나도 차가워진 얼굴로 그냥 호텔로 가자고 했다. 나와 큰 애의 냉랭한 기후에 둘째는 내 손을 꼭 잡고 따라 나왔고 남편은 말로 큰 애를 다독이는 듯했지만, 이제는 내 마음이 더 상해서 그림이고 점심이고 다 제쳐두고 그냥 호텔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퉁퉁 부은 얼굴로 오르세를 나와, 큰애와 남편이 뒤따르는데도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까는 아름답게 느껴졌던 센강 주변의 거리도 흐려진 날씨 때문인지 그저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게 걷다가 호텔 앞 마트에서 점심으로 가볍게 먹을 음식을 좀 사자는 남편의 제안에 못 이기는 척 들어가 음식들을 살피는데 큰애가 다가와

“엄마 내가 엄마가 기대했던 오르세 망쳐서 미안해.”라고 말한다. 큰 애는 우리가 가고 싶던 미술관 일정을 망치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리 어른스럽지 못하게 대했는가,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후회가 다가왔고, 일부러 그런 것 아닌데 엄마도 피곤했는지 마음이 상해서 너에게 퉁퉁거렸다고 역시 미안하다며 내 마음을 아이에게 고백하고 나왔다.


호텔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 같이 컨디션 회복을 위해 낮잠을 잤다. 나와 남편 둘째는 1~2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는데, 큰 애는 도통 깨지를 못한다. 장장 4시간이나 낮잠을 잔 큰 애가 조금 말끔한 얼굴로 일어나 다시 사과를 하는데, 아까보다는 훨씬 얼굴이 좋아 보였다. 저녁을 먹고 다 같이 좀 더 쉴까 하다가 남편이 못 나간 저녁 산책을 다 같이 나가자 했고 큰 애도 몸이 좀 좋아졌는지 웃으며 그러자 한다. 그렇게 넷이 나와 센강 변을 건너 노트르담 성당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아직 공사가 다 끝나지 않았지만, 해 질 녘의 노트르담성당은 너무도 아름다워 버스킹 하는 사람들의 연주와 노래를 들으며 노을 지는 하늘을 보다 보니, 아까 낮에 우리 서로에게 왜 이리 화를 냈나 하고 마음이 누그러진다. 큰 애도 사진을 찍고 음악을 영상에 담기도 하며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내내 나와 큰 애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을 남편과 둘째도 그제야 편안히 웃는다.

나이 지긋하신 멋쟁이 신사분의 버스킹. 해 질 녘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일정이 긴 여행이고, 또 많이 걷고 다니는 고된 여행이라 서로의 컨디션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또 서로에 대한 감정을 잘 컨트롤하지 않으면 오늘처럼 하루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하루는 망친 걸까? 사실 오르세에 가고 싶긴 했지만 정확히 절반의 마음은 나 역시 호텔에 눕고 싶었다. 아마 말하지 못했지만 남편과 둘째도 그랬을 터.

노트르담 성당에서 앉아 버스킹 하는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의 연주를 듣고 있는데 편안한 마음이 들어 행복이 다시금 번진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것에 계획을 두고 마음을 쓰기보다는 서로가 편안하게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야 진짜 우리 가족의 여행이 되는 것 같다는 소중한 교훈이 새겨진 날이었다. 자꾸 가야만 하는 장소에 힘주지 말고 함께 하는 시간에 힘주자는 생각을 하니 오늘이 망친 것 같지 않다. 그러니까 큰애야. 엄마의 오르세를 망쳐서 미안하다는 생각일랑 하지 마렴.

오늘도, 여행 중에도 여전히 부족함을 깨닫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엄마가 나였다.

나는 파리에서, 에펠탑도, 개선문도 아닌 이 센강의 노을이 가장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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