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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Oct 02. 2023

볼차노에서의 마지막 날

정들면 이별의 연속인 유럽여행. 등산은 결국 못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어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음에도 고지대는 고지대였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몸살기운이 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성당에 가서 미사도 봐야 하는데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사실 트래킹이랄 것도 없는 산책 정도였는데 이렇게 몸이 무거워지다니. 등산으로 인한 피로보다 이곳으로 오기까지의 긴장이 몸을 더 피로하게 한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생각뿐 쉬이 일어나 지지 않는데, 마침 혼자 아침 산책을 다녀온 남편이 들어온다. 남편이 성당에 가서 미사 시간을 확인했다고 천천히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말에 꼼지락 거리다 일어나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컨디션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계속 누워있을 수도 없어 부엌으로 가던 중 안방을 빼꼼 열어 아이들을 보았다. 해가 들어와 환한 방임에도 한참 꿈나라 여행 중이다. 푹 자고 있을 때에만 볼에 뽀뽀할 수 있어서 냉큼 들어가 둘째 볼에 뽀뽀를 했더니, 조금 아주 조금 기운이 나는 것도 같다.  


아침을 준비하며 보니 남편도 피곤한 기색이다. 서로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나누다 아차 싶어 캐리어에서 비타민을 꺼냈다. 흡수가 빠르다고 해서 면세점에서 구입한 액상 비타민을 매일 복용하던 터였다. 그런데 요 며칠 그것조차 깜빡했구나 싶었다. 냉장고에 있던 과일들을 씻어 아침을 준비해 아이들을 깨워 식탁으로 부르는데 몸이 무겁기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성당 미사만 아니면 더 재우고도 싶었지만, 생각보다 주일 미사시간이 다양하지 않아서 조금 피곤하더라도 애들을 달래 성당에 가야 했다. 아침 식탁으로 온 아이들이 차려놓은 토마토 복숭아 등의 과일과 빵을 각자 우물거리며 다들 기운을 내고 있었다.


날마다의 우리의 아침, 신선한 과일+ 치즈+빵+계란+살라미

아이들이 씻는 동안 아침 먹은 것들을 정리하며 남편에게, “아무래도 오늘 세체다는 무리겠지?”라고 물으며 ’ 제발 무리라고 해줘.‘라는 표정을 보냈다. 남편 역시 애들도 우리도 또 산행은 힘들 것 같다며 우선 미사를 보자고 한다. 이탈리아어 미사라 한 마디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예상하고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큰애가 “엄마 독일어 미사야.”라고 말한다. 성악을 공부한 피아노 선생님께 독일어 몇 마디를 함께 배웠던 큰애였는데,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어떤 언어인지 판별이 가능한 게 신기했다. 나는 이탈리아 말인지 독일어 말인지 내내 알아들을 수가 없긴 했다. 웬만한 곳도 영어 병기가 안되어 있는 곳인데, 신기하게도 볼차노는 독일어 병기가 되어 있는 곳이 많았다. 잘은 몰라도 이탈리아 사람들만큼이나 독일인이 많은 지역인가 보다. 어찌 저찌 알아듣지 못하는 미사를 잘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왔는데 아이들은 내가 또 산에 가자고 할까 봐 나의 말을 기다린다.


“오늘은 모두 피곤하니까 아무래도 세체다는 힘들겠어. 그냥 근처에 호숫가에 가서 구경하고 오자!”라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오늘 가장 밝은 표정을 보여준다. 함께 젤라토를 하나씩 사들고 집으로 들어와 잠깐 쉬었다. 미사도 보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누워 있으니 몸이 좀 나아지는 것도 같다.


조금 쉬었다가 아이들과 함께 근처 ‘카레짜 호수’에 갔다. 호수가 아름답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가서 직접 보니 아름답다는 말로는 설명이 다 되질 않는다. 푸른 호수에 길게 뻗은 나무들의 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수의 물과 둘러싸고 있던 나무와 그 뒤를 감싸주고 있던 바위 산들. 하늘까지 파래 이곳이 스위스인지 오스트리아인지 이탈리아인지 분간이 안 가는 국적 불명의 그저 아름다움이었다. 호숫가를 가볍게 산책하고 카페에 앉아 아이들은 피자를, 우리는 커피를 나눠 마시는데 막내가 이 피자가 이탈리아 첫 피자라는 말을 한다. 사실 이탈리아이긴 했지만, 호숫가에 있는 카페라 냉동 피자를 데운 느낌인데, (물론 그래도 맛있었다.) 이런 음식으로 이탈리아 피자를 먹어봤다고 하기엔 아쉬웠다. 집으로 돌아가 근처 맛집을 탐색해 보기로 하고 약간의 기념품을 사고 돌아왔다.



무심한 남자 아이들인데도 너무 예쁘다는 말을 백 번쯤은 들은 것 같다.

호수 구경을 마치고 다시 볼차노에 돌아와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동네를 돌아다녔다. 피자를 파는 가게도, 스파게티 가게도 많이 있긴 했지만 저런 음식은 앞으로 많이 먹을 것이기에 슈바인 학센과 수제 맥주를 파는 식당에 가자며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이 마침 숙소 바로 앞이었다. 구글 평점이 높은 식당이라 이른 저녁 시간임에도 사람이 꽤 많았다. 테라스 석은 아무래도 흡연자가 많아 망설여졌지만, 파리의 마지막 식당은 실내임에도 담배 냄새로 너무 힘들었던 우리라, 유럽은 테라스지! 라며 테라스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이 하나 둘 나오자, 높은 구글의 평점이 이해가 되었다. 지금까지 유럽에서 먹은 식당 중에 애들이 가장 많이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 우리는 학센을 하나 더 시켰는데, 점원이 조금 놀란다. (다들 맥주를 추가하는데, 우리는 음식을 추가하는 대식가 가족이다!)

정말 맛있었던 볼차노의 학센집. 애들 들여보내고 남편과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고 나니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남편과 맥주 한 잔을 더 마시고 싶어 진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숙소에서의 와이파이타임을 선물해 주고(물론 남편이 숙소 방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다.) 우리도 맥주 한 잔을 더 기울였다. 처음에 맥주 샘플러를 시켜 여러 종류를 마셨는데 골라 마시는 재미가 있었다. 그 약간의 샘플러를 마셔보고도 취향에 맞는 맥주를 고를 수 있었는데 나는 약간 과일향이 맥주를 골랐다. 때마침 바람마저 솔솔 불어 시원함을 더해주었다. 맥주 탓인지 바람 탓인지 기분이 더 좋아진다. 남편과 둘이 서로 수고했다며 맥줏잔을 부딪히니 그동안의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 든다.

 이 도시가 이제야 편안해졌는데 내일은 또 피렌체로 떠나야 한다. 유럽에 온 이래로 계속 정들면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는데 볼차노는 유독 더 아쉬움이 남았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아까부터 큰 애가 여기에 더 있고 싶다며 나지막하게 여러 번 말한다. 다음에는 이곳에 일주일 아니 열흘 정도 머무르자고. 아들아. 그러면 산을 더 많이 타야 하는데?라고 묻는 내게 고생을 덜 한 아들이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괜찮다고 말한다.

 다음에는 그렇게 할게. 등산화도 다 챙기고, 스틱도 다 챙기고, 여기에서 열흘쯤 머물게!라는 나의 호기로운 말에도 웃어 넘겨주는 걸 보니, 여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도 볼차노가 좋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산행은 많이 못했지만, 함께 올라가지 못한 산은 다음으로 미룰 수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다음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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