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 과잉과 자기 수용 사이에서
얼마 전 유퀴즈에서 지디가 나눠주었던 이야기다. 최근 내 마음의 흐름을 마치 그의 언어로 해석해 번역해 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침 그 주에 삶을 나누는 그림 모임이 예정되어 있어, 이 인터뷰를 인용해 이야기를 나눴다.
https://brunch.co.kr/@leesomstory/22
마음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사람들은 대개 이겨내려고 애쓴다. 어떻게 하면 그 상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궁리한다. 때론 행동으로 옮긴다.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한다. 어떤 이는 책을 통해 답을 찾고 싶어 하고, 사람들을 만나 위로를 얻으려 하거나 상담을 다닌다던지 나를 변화시키려 한다던가. 상황에 정면으로 부딪혀보기도 하고, 종교에 의지하거나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고립시켜보기도 한다. 혹은 무신경한 체 괜찮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외려 마음이 멈춰버린 과정과 이유를 면밀하게 이해하고 분석하려 해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든 괜찮아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모든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분명 어느 지점들에서는 이것들이 실제로 필요하며 견뎌낼 힘을 준다. 하지만 감정의 표면만 훑은 채 방어기제를 반복하는 건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미해결 된 마음은 내면 깊숙한 곳에 내밀히 숨어 무럭무럭 자라다가, 나를 버겁게 했던 비슷한 상황이 다가오면 언제 괜찮아지기나 했었냐는 듯 다시 수면 위로 폭발하며 튀어 오르게 되어 있다. 위기를 넘기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들이 때로 도움은 되지만, 한계가 있으며 어떤 것들은 그저 일시적이라는 거다. 그런 시간들 너머 우리 내면이 진짜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제발, 부디, 그 무엇이든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감정에 있는 그대로 순응하는 것."
하여, '아픔으로부터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나 생각은 애석하게도 사실 내면 깊숙이 가닿지 못한다. 분명 나아진 듯하다가도 계속해서 같은 이유로 힘들어진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풀이되는 삶을 겪게 된다. 그나마 반복되는 패턴을 인식이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그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내 삶은 도대체 왜 이렇지. 그냥 난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봐.' 하는 자조에 그치기도 한다. 그러다 힘을 내 보겠다고 어떻게든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 보는 경우도 있다지만 이내 다시 커다란 벽에 부딪혀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알 수 없는 돌부리에 걸려 대차게 넘어져선 절뚝이는 다리를 붙잡고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날도 온다.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왜 여전히 힘든 걸까." 그리고선 이 모든 과정을 또다시 되풀이한다.
이건 모두 나의 이야기다. 지독한 결핍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나. 그리고 그리될 수밖에 없었던 애달픈 나.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 보고 나면 손을 놓게 된다. "아, 감정의 영역은 뭔갈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니구나"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달까. 그럴 수밖에 없게 되는 시점이 오게 된다.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를 하면 할수록 일시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가 싶다가도 똑같이, 혹은 더 크게 상처는 튀어 오르고 말았으니까.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까지 괜찮아진 줄 알았다가도, 그러니까 내가 변화해서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줄 착각했다가도 내면 깊숙한 곳에 잠시간 가라앉아 숨을 고르고 있던 검은 돌덩이는 때로 어떤 상황을 만나면 천만 시간의 노력을 넘어 수면 위로 거세게 제 자리를 찾아 눈앞에 끔찍하게 등장해버리곤 했다.
그게 너무 아팠다. 좌절하며 내려앉아 "도대체 여기서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하는 생각으로 어느 날엔 애써 없는 힘을 쥐어짜 마음을 도닥여 봤다가 다시 손을 놓아 버렸다가. 수만 번의 경험이 축적되며 깨닫게 된 건 그저 뭘 하려 하지 않는 것만이 내가 나를 수용하는 일이라는 거였다.
자연을 바라보듯 마음을 바라봐야 했다. 자연은 제멋대로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늘 맑은 날이었으면 좋겠지만 어떤 날엔 태풍이 오고 비바람이 분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여 날씨가 변하진 않는다. 때론 태풍이 들이닥쳐야 순환을 통해 원래의 제 자리를 찾아가기도 하고. 그런 모든 변화엔 명료한 이유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그저 속절없이 마음껏 흘러갈 뿐. 그런 생각으로 어떤 날엔 내가 힘들어진 이유를 찾아내지 않고 그 자체로 흘려보내기도 해 본다.
이런 흐름의 이야기를 지난 모임에서 나눴다. 힘든 시간을 피하거나 이겨내려 여러 가지 방법을 써 보다가 이제는 감정에 순응하면서 머물려고 해 본다고. 그렇게 되었다고. 만약 여전히 받아들이기 버거운 마음이 있으면, 그 어려운 상태를 또 있는 그대로 수용해보기도 한다고.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삶의 태도가 "멋지다"고.
분명 좋은 의미를 담은 따스한 말이었을 텐데 희한하게 왜인지 그 말을 듣자 삽시간에 슬퍼졌었다.
사실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나만의 방법을 찾아 아픔을 극복해 낸 대단한 사람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의 끝은 결국 자기 수용으로 닿게 되어 버렸다. 다른 그 어떤 방법은 다 소용이 없었으니까. 그걸 이젠 너무나 잘 알게 되어 버려서. 10년간 온 세상을 헤매고 돌다 결국엔 나를 낫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내려놓게 되면서, 슬프게도 이제야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거다. 결국 난 내가 그토록 가장 원하지 않던 모습이 되어버린 거였다. 내게 그건 하나도 멋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깊숙이 아플 뿐이었다.
허황된 꿈. 부풀려진 자기애. 자의식과잉의 상태로 나만은 나를 낫게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긴 시간을 보냈다. 전에 한 날은 상담 선생님에게 반복되는 트라우마를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정말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대체 언제 낫는 건지 모르겠다고. 대답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선생님은 그 마음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게 정서적 통합이라는 뉘앙스를 풍기셨던 것 같다. 그때 속으로 오만하게 생각했었다. '그건 결국 치유의 실패에서 오는 일종의 합리화 아닌가. 나는 아니야. 나을 수 있을 걸?'하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난 다를지도 모른다는 특별함에 취해있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야 살 수 있었기에.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부정하다 죽고 싶었기에. 요즘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나 자신을 아프고 애틋하게 여기며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하여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해준 "멋지다"는 짧은 말에 지금까지 걸어온 긴 여정에 대한 "애도의 슬픔"이 치밀듯 올라왔던 게 아닐까. 아마 그건 지나온 길에 대한 안쓰러움일지도, 상실감일지도. 헛헛함일 수도, 애도의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정년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극의 주인공인 정년이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무리하게 목을 쓰며 국극을 연습하다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극 중에서는 이 상태를 목이 '부러졌다'라고 표현한다. 정년이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해 예전의 소리를 되찾으려 있는 힘을 다해 보지만, 결국 되지 않는다.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다 그는 결국 이전으로의 회복을 내려놓고 "부러진 그 상태 그대로" 자기만의 노래를 하며 살아가게 된다.
어쩌면 내 삶의 모양새도 이와 일견 닮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망가져버린 곳을 내 기준의 정상 범주로 회복시키고 싶었다. 오만 노력을 다 기울여 보아도 그렇게 되질 않으니 차라리 누군가 삶을 끝내버려 주기를 바란 적도 여러 번. 그런데 이제는 나아가야 할 길을 안다. 마음에 구멍이 나면 난 대로 그저 나로서 내 곁에 꾸준히 살아남아주는 것. 공허한 외로움이 찾아올 때면 '오늘은 그런 날이구나'하고 묵묵히 순응하는 것. 그 순간을 피하고자 오랜 시간 보호막을 켜켜이 쌓아 올리던 내게, 이제는 더 이상 뭔가를 해주려는 게 아니라 생명줄처럼 쥐여 잡고 있던 고집 센 옷가지들을 스스로 하나하나 가뿐히 벗어나갈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것. 혹여 나아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곁에 있어주는 것.
괜찮아지면 괜찮아지는 대로, 엉망이면 엉망인 대로. 그렇게 내 안의 무한한 모습들 속에서 유영하듯 헤엄치며 살기를 바란다. 결국엔 나에게 순응하고, 별 수 없이 나에게 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