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너에게, 안녕.
꿈을 꿨다.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가능한 한 살뜰히 챙겨 줬지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나와 가까운 사이인 게 알려지면 해가 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향한 채 대화를 한다. 같이 있지만, 함께여선 안 된다.
내가 지닌 외로움의 본질이 어쩌면 이거였을까.
나의 우울은 주변에 해를 줄 것 같다. 스스로 만들어낸 시선과 실제 경험의 결합에서 오는 관념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한 느낌을 따라가 보면 나는 아마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 같다. 대학시절의 나는 한동안 조울 증세가 있었다. 친구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뱉어낼 용기가 없어 당시 가끔 마음을 풀어내던 싸이월드에 몇 자 적었다. 그조차 함축적이어서 아마 알아볼 수 없을지도 모를 정도로. 내 마음을 알리는 게 창피했다. 보이고 싶으면서도 극도로 감추고 싶었다. 나도 이런 내가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데 과연 누가 날 다독여줄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을 것 같았다.
글을 쓴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의 밤,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 있어? 내가 힘들 땐 네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네가 힘들 땐 내가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미안해"라며 친구는 긴 시간 울었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걸까. 나 대신 목놓아 울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걸까. 그 마음은 내게 와닿았고 신기하게도 조울 증세는 그날 이후 급격히 호전되었다. 덕분에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반면 죄책감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찾아왔다. 아프다고 이야기하면 슬퍼하는구나. 알리면 안 되겠다. 주변을 힘들게 하긴 싫어.
누군가의 진심 어린 위로가 따뜻한 경험보다 무거움으로 담긴 이유는 뭐였을까.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음에 짐을 더하느니 차라리 혼자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나의 실타래들.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게 막는 내가 나를 죽음으로 내몬다.
이번주 상담에 가게 되면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다. 실은 우울이 요즘 나의 방에 자주 찾아온다. 한동안은 보지 못했는데. 나의 첫 우울 친구는 2019년,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다. 생을 끝내지 않고 삶을 찾아 돌아온 뒤 다신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 좀 살만해졌다 싶던 날엔 한동안 상담을 그만둘까 고민했다. 고비도 지났고 괜찮아졌으니 슬슬 끝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 종결의 생각을 거둔 이유는 혹여나 내게 다시 그 시절이 돌아올까 두려워서였다.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싶었던 거다.
이후 몇 해가 지나고, 마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면서 언젠가 우울이 나를 꼭 다시 찾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엉망인 순간들을 그만 삶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시점부터 차마 마주할 수 없어 저 멀리 버려두었던 수많은 날의 감정들이 나를 향해 하나 둘 인사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검고 커다랬던 우울도 언젠가의 시기에 분명 내게 오겠구나, 생각했다.
마음의 성장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외면하고 버려왔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는 것, 나를 버겁게 짓눌렀던 마음들이 사라지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조차 품에 담을 수 있게 되는 것. 그런 게 아닐까. 기다렸던 나의 우울 친구, 다시 만난 너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고 기쁘구나. 이번에 찾아온 너와는 전보단 조금쯤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동안 너를 증오하고 미워해서 미안해.
그러자 그가 답한다.
나를 기다렸구나, 만나줘서 고마워. 너와 인사할 수 있게 되길 기다렸어.
얼마 전 영화 <인사이드아웃 2>를 봤다. 자아 통합은 기억 저편으로 보내두었던 더는 보고 싶지 않던 감정들을 내 것으로 수용할 때 이루어진다. 오랜 시간 나를 만날 수 없어 지극히 외로웠던 이 작은 소녀의 무거운 우울이 이제는 함께의 힘으로 한 방울씩 천천히 덜어져 가기를 바라본다.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너의 곁에서 아플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