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는 편지를 사랑한다 그것도 손 편지를
오리는 펜보다는 연필을 좋아해서 손 편지를 쓰기 전 커터 칼로 연필을 폴짝폴짝 깎곤 한다
4B 연필은 안 돼 너무 진심인 마음 같을 테니까
HB 연필은 안 돼 딱딱한 마음 같을 테니까,라고 오리는 중얼거리며 2B연필을 조금은 뭉툭하게 깎는다
폴짝폴짝 깎인 연필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편지지 위를 계속 폴짝이고 싶어 한다
오리는 왼 날개로 오른 날개가 쥔 연필에게 꿀밤을 먹인다
제발 침착해. 편지지 위의 마음은 너무 진심이어도 딱딱해서도 안 되니.
편지지 아래에 이런 제목의 책이 있다
<오리의 편지 철학>
부제: 인사 계절 추억 감사 목적 사랑
* 인사
안녕, - 꼭 쉼표를 찍어야 한다 폴짝거리는 마음이 쉬어 가도록 - 으로 시작한다
오리의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다 편지에는 오직 하나의 이름만이 쉼표의 뒤를 이을 수 있다
그리곤 고슴도치야, 하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 계절
인사 이후는 언제나 적막하다 편지도 인사를 받으면 잠에 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땐 계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좋다
생일 편지라면 고슴도치가 태어난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사과 편지라면 소란한 밤의 계절을
고백 편지라면 고슴도치의 가시에 찔렸던 그날의 계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좋다
오리는 이런 글을 서랍 속에서 발견했다
가을이 왔나 봐. 발자국이 다채로워지고 있어. 바람이 장난을 걸어오고, 솔방울도 발을 간지럽혀. 네가 태어난 가을은 너 만큼이나 재미있고 아름답구나.
그러면 편지는 잠에서 깨어나 그 계절로 오리를 이끈다
* 추억
고슴도치와의 추억을 나열한다
어렵다면 계절과 추억을 연결 지어 시작해 보도록 한다
가을엔 발 끝에 솔방울이 차이지. 어느 날은 붉은 낙엽 하나가 내 발 위에 떨어졌는데, 바로 그 앞에 솔방울 하나가 있었어. 낙엽이 마치 솔방울을 지켜내려는 듯. 나는 솔방울을 주우려 몸을 굽혔어. 그때 오이를 가시에 꽂고 달려가는 너를 본 거야. 솔방울을 줍는 오리랑 오이를 꽂고 달려가는 고슴도치라니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
오리는 편지는 목적을 가진 글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편지는 마음을 옮겨 적어보는 과정이다.
세상 살면서 점점 얼굴의 안쪽으로 등을 돌리는 입이 목젖에다 대고 말하는 마음을 손으로, 날개로, 옮겨 적는 것이다
사선으로 쓰인 메모가 있다.
추억은 도망 다니는 마음이 편지지 위로 올라오도록 하는 오징어 잡이 배의 불빛 같은 것-!
너무 진심이지도 않고 너무 딱딱하지도 않은 마음이 편지지 위로 슬금슬금 올라올 때까지 추억을 나열해야만 한다
* 감사
<오리‘s 7대 감사멘트>
이 편지를 읽어줘서 고마워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행복한 마음으로 편지를 쓸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편지를 쓰는 이 순간을 소중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숨 쉬어 줘서 고마워
너라서 고마워
고마워
* 목적
가끔 편지에 목적이 따를 때가 있다 목적은 한 줄까지로 제한한다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그날은 정말 미안했어
사랑해
* 사랑
편지는 사랑하는 자에게 보내는 것이다
편지지에는 증오가 담겨서는 안 된다
안녕, 이라고 쓰이는 순간부터 오리가,라고 끝맺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자 한 자 적어 나가는 것이다
오리의 편지 철학 마침.
을 끝으로 오리는 다시 연필을 잡는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