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중 운전하는 시간이 많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거나 때로는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기도 한다. 그 시간은 온전히 내 것 같지만, 사실 혼자만의 시간이 때로 외롭고 고독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가끔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도 있고 갑자기 졸음이 몰려올 때도 있다. 하지만 주위에 휴게소도 없고 차를 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게 졸음을 깨고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된다.
그래서 나는 주로 엄마에게 전화를 하지만, 요즘엔 누나의 쌍둥이 손주들을 돌보시느라 전화를 받지 못하실 때가 많다. 그럴 땐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친구 기민에게 전화를 건다. 그는 항상 내 전화를 받아주고, 늘 힘이 되어주는 친구다. 결혼하지 않은 기민이는 키도 크고 덩치도 크지만, 성격은 참 착하고 순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쌓아온 우정 덕분에 지금도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다.
우리는 서로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오랜 시간 함께 지켜봐 온 사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서로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솔직한 감정이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수 있다. 과거를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고, 그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졸음이 밀려오던 어느 날, 나는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리고 조금은 졸음을 쫓기 위해서였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친구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친구.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어도, 그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 전화를 건다는 걸 눈치채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시간이 아깝거나 통화가 귀찮아서 받지 않을 법도 한데, 기민이는 항상 내 전화를 받는다. 어쩌면 내가 이 친구와의 전화에 중독된 건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내가 민망할 정도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무의미한 푸념을 늘어놓을 때도 있다. 그런데도 친구는 어떤 조언이나 위로도 없이 그저 아무 말 없이 듣는다.
물론, 가끔 친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혹시 전화를 받기만 하고 잠시 전화기를 내려놓은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답답함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게 된다. 그 친구는 말 대신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는지 세어보면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우리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연락이 닿으면,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쉽게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전 친구와 전화를 끊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일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 일상과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런 친구가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오늘도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친구는 변함없이 내 전화를 받았다.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말들, 혼자 편하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다가 이야기의 끝에 친구는 웃으며 "힘내자"라며 나를 격려해 준다.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된다. 전화 한 통,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많은 힘이 된다. 필요한 대화가 아니어도 가벼운 농담이나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다.
그 친구와의 대화가 늘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 평범함이 오히려 더 소중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이야기하고, 때로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래서 가끔은 생각한다. 이 친구가 내게 얼마나 고맙고, 또 얼마나 힘이 되는지.
나는 친구가 늘 행복하길 바란다. 건강하고, 그가 바라는 삶을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어쩌면 그 마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전화를 걸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쓰지 않아도 서로에게 작은 쉼이 되는 것, 그게 우리가 이어온 우정의 모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