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편
"영감님, 그래도 제가 좀 더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가족분들이라도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한 씨의 간곡한 물음에 최 씨는 소주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술을 털어 넣었다. "아니, 됐네. 벌써 40년 가까이 남남으로 살아왔는데 무슨. 이제 와서" "하지만" 한 씨가 말을 얹으려 했지만, 최 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 서린 외로움과 체념이 한 씨의 말문을 막아섰다.
"사실 말이야, 난 자네가 처음엔 좀 불편했어. 세상물정 모르고 곱게만 자란 것 같은 사람이 봉사를 한다면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내 속마음이 편치 않더군." 최 씨는 술병을 들어 한 씨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오늘따라 하고 싶은 말이 술을 따라 흐르는 모양이었다. 한 씨는 술잔을 쥔 채 생각에 잠겼다. 최 씨의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 소주 맛이 점점 씁쓸하게 느껴졌다.
‘세상물정 모르고 곱게만 자란 것 같은 사람이라’ 한 씨는 최 씨의 말이 목구멍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 씨에게 특별한 재주가 있다면, 그건 암기력이었다. 수많은 것을 외워야만 했던 입시 경쟁 시대를 거친 세대. 머릿속에 수없이 많은 지식을 꾹꾹 눌러 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그 시절을 한 씨는 잊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암기력은 단순한 재주 이상의 것이었다.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 무기였던 셈이다. 그는 잘 외워 좋은 대학을 갔고, 잘 외워 대기업은 아니어도 처자식을 건사할 만한 회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버텼다. 사회적인 처세술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묵묵히 그 시간을 보냈다.
딸을 시집보내고 난 후, 한 씨는 인생의 큰 과제를 마친 듯한 허탈감을 느꼈다. 이제는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맴돌았다. 명예퇴직 대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한 씨는 회사에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높은 연봉을 받으며 계속 다닌다는 것이 자신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명예퇴직은 납득할 만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안전하고 보람있는 노후를 보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최 씨를 도와주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돈도 없고, 처자식도 없는 최 씨에게서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가. 평범하다라는 우월감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부끄럽게도 자신이 최 씨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한 씨의 생각을 걷어내듯 최 씨가 말을 건넨다. “그런데 자네 상당히 강단이 있는 사람이더군. 나같이 비틀리고 뒤틀린 사람이 자네를 기다리게 만드니 말이야.” 최 씨는 세월이 주름처럼 패인 그의 투박한 손으로 한 씨의 손을 꽉 잡았다. “고마웠네.”
한 씨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기를 굽는 열기 때문일까, 자신의 마음이 불편해진 탓일까. 한 씨가 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차갑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물, 그는 차가운 물로 무엇을 넘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