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한 씨, 따님은 잘 지내시나?" 최 씨가 불쑥 물었다. "아 글쎄요. 뭐, 별일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한 씨의 대답에는 머뭇거림이 묻어 있었다. 최 씨는 술을 한 씨의 잔에 부어주며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 있는 모양인데" "콜록, 크흠." 한 씨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찌개의 뜨거움에 기침을 했다. 최 씨를 마주 보는 한 씨의 눈빛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최 씨 앞에서라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씨는 숨을 내쉬며 최 씨에게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한 씨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얼마 전에 딸 내외가 저녁 먹으러 왔었습니다. 그런데 사위가 딸한테는 알리지도 않고, 퇴직금을 중간 정산하고 청약통장까지 해약해서 전세 사기 당한 자기 누나에게 보냈다는군요. 사정이야 딱할 수밖에 없지만, 이제 갓 결혼한 지 2년밖에 안 됐는데 곧 전세 계약도 만료되어 이사를 해야 할지 전세금을 더 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이런 일이 터지니" 한 씨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자신의 하소연을 씹어 삼키듯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주가 속을 달래주는 듯했다.
한 씨의 말을 묵묵히 듣던 최 씨도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응어리진 가래가 함께 내려가는 듯했다. 최 씨는 숟가락으로 김치찌개를 푸석푸석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국자로 불판 위의 고기를 집어 한 씨의 밥그릇 위에 얹어 주었다. 노릇노릇 익은 고기에서 김치찌개의 시뻘건 국물이 밥알 사이로 스며들어 갔다.
"자네도 맘고생이 많았겠군.” 최 씨의 위로에 한 씨는 고개를 숙였다. 숟가락으로 퍼 담은 김치찌개는 밥알 위로 촉촉이 스며들어 갔다. 밥이 찌개를 머금는 것인지, 찌개가 밥을 적시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한 씨는 밥과 찌개, 고기를 번갈아 가며 입 안 가득 밀어 넣었다. 오물오물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났다. 최 씨는 잘 익은 고기를 집어 한 씨의 밥그릇에 얹어 주었다. 그러면서 느리게 말을 이었다. "인생이 막상 겪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 참 많단 말이지.“
"치익, 치이익—" 고기를 뒤집자 지글거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났다. "고기는 좀 타야 제 맛이 나지 않겠나." 최 씨의 말에 한 씨가 술잔을 기울였다. 한참 최 씨와 한 씨는 말을 삼키고 술잔을 비워냈다.
목구멍으로 넘어간 술이 온몸에 열을 퍼뜨리는 듯했다. "영감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뭘 말하는 건가?" "암 치료 말입니다. 어떻게 하실 건지" 한 씨의 물음에 최 씨는 잠시 침묵했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최 씨는 한 씨와 눈을 마주치더니,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아 글쎄 말이야" 최 씨는 물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키고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러더니 한 씨를 향해 깊은 눈빛을 보냈다. "한 씨, 자네와 함께한 시간 덕분에 내가 아직 세상에 속해 있다는 걸 느꼈네. 죽음을 기다리는 이 늙은이에겐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야. 이제는 억지로 버티고 싶지 않아. 때가 된 것 같네. 내가 힘겹게 걸어온 길의 마지막 한 걸음이 남았다는거잖나. 이젠 그만하고 싶네." 담담한 어조였지만, 말 속에는 깊은 감정들이 배어 있었다. 그 말을 듣는 한 씨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