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한 씨의 과거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부모의 말을 잘 들었고, 잘 외웠고, 시험을 잘 봤고, 정해진 길을 꾸준히 버티며 그나마 합리적인 선택들이라고 생각하며 살면 그만이었다. 정해진 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답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보다 너무 복잡한 이 상황의 무게에 어깨가 ‘툭’ 떨어졌다. 술잔을 ‘탁’내려 놓으며 한 씨는 최 씨를 바라보았다.
“영감님, 다른 건 몰라도 호스피스라도 받으실 수 있게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이건 양보못합니다.” 한 씨의 목소리는 고집스러웠다. 그는 힘주어 최 씨의 손을 맞잡았다. 마른 뼈만 앙상히 남은 손, 식어가는 체온이 한 씨의 가슴을 후볐다.
"한 씨 자네는 고집있는 사람이야. 내가 뭐라고 해도 막무가내로구만."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최 씨가 웃었다. 한 씨의 눈에 그 웃음은 체념인 듯, 연민인 듯, 안쓰러움인 듯 복잡미묘하게 비쳤다. 떨리는 눈꺼풀을 닫은 채 한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 씨와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외로운 노년을 묵묵히 견뎌내는 그의 모습이 가슴 저리게 아른거렸다.
“고맙네."
이내 들려온 최 씨의 대답에 한 씨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들은 한참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최 씨는 술기운과 자신의 고독이 어우러진 방안에 누워본다. 술먹고 진통제는 안된다고 했던 것 같지만, 오늘같은 날에는 기침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같은 날은 그냥 잠이 들었으면' 그는 물한컵과 진통제를 들이킨다.
천장이 빙빙 돈다. 최 씨는 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는 어느 시절로 떠나고 있을까? 삶의 종장에서 그는 무엇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일까.
늦은 밤, 한 씨는 택시 뒷좌석에 몸을 기댄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가로등 불빛이 흘러가는 듯 스쳐 지나갔다. 라디오에서는 옛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한 씨는 피곤했는지 괜스레 목이 간지러워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른 기침을 했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깜짝 놀라 전화를 받자, 아내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어디에요? 오는 길이에요?” 걱정스런 목소리가 한 씨를 걱정하고 있다.
“여보, 그동안 참 고생 많았어.”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당신. 술 많이 먹었어요?” 아내는 살짝 당황스런 기색과 염려가 되는 목소리다.
“응 최 씨 영감님하고 좀 마셨어.”
“몸도 안좋으신데 어떻게요. 잘 모셔다 드렸어요?”
“응.”
"잘하셨어요. 여보 선화 일로 많이 걱정되죠?"
"글쎄, 난 좀 막막하더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맞아요. 여보, 당황스럽고, 막막하고 그랬죠.”
아내가 전화기 너머로 짧은 숨을 내쉰다. 한 씨는 생각에 잠긴 듯 긴 숨을 내쉰다.
말 없이 짧은 숨과 긴 숨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