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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색 Oct 27. 2024

기침이 옮다.

14편

한 씨는 최 씨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의외로 평온해 보이는 그 표정이 한 씨를 놀라게 했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최 씨는 느꼈다. 기나긴 삶의 끝에서 이 병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마침내 찾아온 종착역이라는 걸.     

 

의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최 씨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항암, 방사선 치료 그것들이 삶을 연장해 줄지는 몰라도,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덧없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최 씨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죽음 앞에 선 내 삶은 어떤 모습인가.'

최 씨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절망, 가난에 찌든 외로운 노년 그러나 한 씨와의 만남은 삶의 끝자락에서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비록 남은 시간은 얼마 없지만, 생각해보면 한 씨가 곁에 있어 고마웠다. 최 씨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한 씨는 어느새 복지 제도에 대해 줄줄 털어놓고 있었다. "영감님, 독거노인이시니까 중증 질환 의료비 지원을 받으실 수 있어요. 노인 장기요양보험 혜택도 있고요. 시청에서 따로 지원받을 수 있는 것들도 알아보고 있어요. 담당 사회복지사 선생님께 여쭤볼 생각이거든요. 그리고 병원 방문은 제가 모시고 다닐 테니 걱정 마세요" 한 씨의 말은 최 씨의 마음에 아름답지만 금새 사라져야 하는 해질녘 붉은 노을처럼 스친다.     

 

아름답고 화사하지만, 손을 뻗으면 희미하게 사라지고 마는 봄날의 꽃잎 같은 이야기가 맴도는 동안 최 씨는 묵묵히 한 씨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느 순간 한 씨는 할 말을 다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영감님, 혹시 먹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저녁이라도 든든히 드시고 들어가셨으면 합니다." 그 물음에 최 씨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씨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쿨럭, 켁켁, 흐으읍 켁, 퉤!" 최 씨의 입에서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와 함께 누런 가래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핏줄이 비쳐 보이는 앙상한 손등, 깊게 패인 주름까지. 세월의 흔적이 생생히 어려 있었다. 입을 떼기도 힘든 듯 숨을 고르던 최 씨가 이윽고 중얼거렸다. "한 씨 그 삼겹살집, 한 번 더 가 볼 텐가?“   

  

석쇠 위에서 삼겹살이 노릇노릇 익어갔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불판 위에서 춤추는 고기 위로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이번엔 김치찌개도 시키세나." 최 씨의 말에 한 씨가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고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 씨는 숟가락으로 김치찌개국물을 떠 먹었다. 매콤하고 시원한 국물이 속을 달래주는 듯했다. 그새 최 씨의 앞에 놓인 술잔은 벌써 몇 번이나 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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