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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색 Oct 27. 2024

기침이 옮다.

12편

기대에 부풀었던 저녁 식사는 어느새 변색되는 과일처럼 색을 잃어 갔다. 행복해야 할 시간이 씁쓸함으로 얼룩져 버렸다. 가족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식탁 위의 음식들도 이제는 먹음직스럽지 않게 보였다. 모두의 입맛은 따끈한 국이 김으로 식어가듯 사라졌다. 한 씨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씨 부부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씨는 흐느끼는 딸을 품에 안고 작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내는 어두운 표정의 사위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부모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은 방으로 향했다. 식탁에 남은 한 씨 부부는 무거운 침묵 속에 남은 음식을 치웠다. 접시를 부딪치는 소리만 식당에 메아리쳤다.     


식기를 닦는 소리, 찬장 문을 닫는 소리, 물을 튼 소리까지. 평소 같았으면 일상의 평화로운 소리였을 진동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롭게 한 씨의 귓가를 때렸다. "쏴아---" 아내가 가벼운 접시를 닦다가 놓치는 소리가 나고 "아야!"라는 짧은 비명이 뒤따랐다. 한 씨는 얼른 아내에게 달려갔다. "여보, 괜찮아?" 조심성 많은 아내가 그릇을 깨뜨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손에 핏방울이 맺혀 나오고 있었다. "괜찮아요. 손이 미끄러졌나 봐요." 아내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불안한 마음이 손끝으로 전해진 모양이다.     


피를 닦아내고 상처를 치료한 후, 두 사람은 얼른 주방 정리를 마쳤다. 그날 밤, 한 씨 부부의 잠자리는 뒤척임의 연속이었다. 한 씨는 사위와 딸에게 해줄 말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옅은 불빛마저 한 씨의 마음을 못 미더운 설렘으로 태우고 있었다. 한숨만 늘어갈 뿐이었다.     


한 씨는 잠을 청한 건지 꿈을 꾼 건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러운 밤을 보냈다. 잠결에 일어나 앉아 물을 한 모금 삼켰다. 곧 아내도 일어나 앉았다. 둘 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이다. "여보, 전 박 서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청약통장에도 제법 돈이 있었을 텐데 그걸 깨다니 퇴직금까지 중간 정산하고 어떻게 그런 중대한 일을 선화한테는 말도 없이 했대요. 휴, 잠이 오질 않네요. 선화는 또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고" 한숨과 원망이 뒤엉킨 아내의 말에 한 씨는 쓴 입맛을 다시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외동으로 살아온 한 씨 부부와 딸이었다. 형제자매를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리는 사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에겐 사위의 행동이 받아들이기 힘든,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경험해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일' 한 씨의 뇌리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말이었다. 언제나 정답을 찾아 무탈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부실하게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딸 내외가 먼저 집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씁쓸한 여운은 한 씨 부부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었다. 아내는 딸의 입에서 나온 '이혼'이라는 단어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한 마디가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한 씨 역시 안정적일 거라 믿었던 딸의 살림살이가 위태로워진 상황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치 가시처럼 속을 긁어대는 듯한 불편함이었다. 밤새 뒤척이며 쌓인 피로에 두 사람의 얼굴에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음의 근심은 어느새 몸으로 번져갔다. 며칠 밤을 뒤척이며 설친 탓에 한 씨는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기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쿨럭, 켁켁, 헥 켁켁" 그 날 저녁 이후, 한 씨 부부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만이 흘렀다. 서로 먼저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할 말은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씨는 딸에게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도 망설여졌다. 결국 두 사람은 변해버린 일상을 기계적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식사를 하고, 청소를 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상의 순간순간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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