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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색 Oct 27. 2024

기침이 옮다.

11편


"아빠, 박서방 누나가 전세 사기를 당했대요. 그래서 박 서방이 저한테는 말도 없이 퇴직금을 중간정산하고, 청약통장까지 깨서 누나한테 보냈어요." 선화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남편의 결정이 이해는 갔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남편이 형제를 도운 것은 나쁜일은 아니었지만, 자신과 상의 없이 모든 걸 결정한 건 섭섭했다. 갓 시작한 신혼살림에 균열이 가는 듯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도 이제 막 아이를 갖자던 참인데" 미래에 대한 꿈이 산산히 깨지는 느낌에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혈육을 도운 남편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장래를 생각하면 걱정스럽고 어찌 할 바를 몰라 혼란스러웠다. 좀 이기적이면 좋겠는데, 남편이 그렇게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 선화가 남편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기에 그녀의 마음은 더 답답했다.      


선화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혼'이라는 단어에 식탁은 순간 얼어붙었다. "아빠, 저 이혼해야 할까요? 너무 화가 나요, 정말" 박서방은 고개를 떨군 채 술잔만 기울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선화의 흐느낌이 식탁 위로 흘러넘쳤다. 무거운 정적이 공간을 지배했다. 한 씨의 시선이 사위에게로 움직였다. 그 눈동자에는 혼란과 의혹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위의 손은 테이블 아래서 떨리고 있었다. 불안감이 손끝에서 전해져 왔다. 한 씨의 마음에는 어두운 예감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지고 있었다. 무언가 결정적으로 잘못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딸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한 씨였다. 그 충격으로 술기운이 확 가셨다. 아내가 사위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박서방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 도대체 누님이 어떤 일을 당한 건데 선화한테는 말도 없이 그런 결정을 한 건가?" 그녀의 목소리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아무리 가족의 일이라도 어떻게 부부간에 상의도 없이 그런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가 있어요?" 아내의 질문에 사위는 대답이 없었다. 숨만 깊게 내쉴 뿐이었다.    

      

사위는 고개를 떨군 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숨을 깊게 내쉬는 것으로 보아, 말을 꺼내기가 두려운 듯했다. 천천히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 장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누나가 겪은 일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유일한 피붙이인 누나의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후, 누나는 그에게 엄마 같은 존재였다.      


"제 마음이 급했던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 또한 혈육의 고통을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화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네요. 용서해 주십시오." 사위의 얼굴에는 슬픔과 후회, 그리고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선화를 가슴 아프게 한 일이 후회되는 듯했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주먹을 쥔채 두손을 무릎위에 올리고 가늘게 떨고 있는 사위였다.

      

한 씨는 사위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사위의 처신이 옳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괜스레 목이 메어 와 한 씨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사위를 응시할 뿐이었다. 공기는 더욱 무거워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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