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의색 Oct 27. 2024

기침이 옮다

9편

아내는 은퇴 후 방황하던 남편이 봉사활동을 통해 다시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꼈다. 동시에 혹여 무리한 봉사로 건강을 해칠까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오늘 밤, 오랜만에 술에 취했지만 홀가분해 보이는 남편의 얼굴에서 아내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잔소리 대신 따뜻한 미소로 남편을 맞이했다. 가방과 코트를 받아들고, 그의 등을 살며시 쓸어주었다. 그동안 가족의 버팀목이었던 남편을 위해 이젠 자신의 의지가 되어주리라 생각하면서.     


 "아이구, 우리 남편 한 건 했네. 장하셔요~! 양말이나 벗고 자요. 여보!" 한 씨의 아내는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소파에 쓰러지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안방으로 향했다. 이불을 꺼내러 가는 길에 벽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가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내일 사위가 오기로 했는데, 오늘 술을 너무 많이 먹은게 아닌가 모르겠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편이 내일 사위와 얼마나 술잔을 기울일지 걱정되었지만, 오늘만큼은 남편이 맘껏 취할 수 있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남편의 몰입하는 모습이 그녀에겐 그 무엇보다 소중했기에.     


 아침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나물국과 개운한 동치미가 놓여 있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보자 한 씨는 문득 어제 너무 취해서 들어온 게 미안해졌다. "이거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건가?" 한 씨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백발이 성성한 그 머리카락이 스르륵 넘어간다. 한 씨는 콩나물국 한 사발을 단숨에 비웠다.      


"아, 속이 확 풀리는 걸. 여보, 당신 콩나물국은 정말 일품이야." 소매로 입가를 닦는 한 씨를 보며 아내가 말했다. "여보, 소매로 입 닦으면 어떡해요. 나이가 몇인데. 오늘 박 서방 온다는 거 잊지 않았죠?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해놓았어요. 오랜만에 오는 건데, 술 너무 권하진 말구요. 오늘은 집에서 쉬어요. 나는 경동시장에 좀 다녀올게요." 아내는 익숙한 손길로 장바구니를 들었다. 6개월 만에 오는 사위를 위해 장을 보러 가는 게 분명했다. 그 장바구니에 사위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잔뜩 담아 올 것이 자명했다.     


한 씨는 기지개를 키며 일어섰다. 아침을 먹고 난 뒤, 평소라면 쉬엄쉬엄 누워 있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정성스레 차려준 아내의 밥상이 고마워, 한 씨는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식기를 닦고 싱크대를 정리하는 손길에는 어제의 술기운으로 느껴지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이 묻어 있었다. 집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문득 청소기를 들었다. 거실과 방을 꼼꼼히 청소하고 나니 집안이 한결 쾌적해 보였다. '이 정도면 밥값은 했지.' 한 씨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누웠다. 청소를 하느라 지친 탓인지, 어느새 곯아떨어졌다.     


"딱딱딱딱, 칙칙칙, 치익— 맛있는 밥이 준비되었습니다. 밥을 저어주세요." 한 씨의 아내는 콧노래를 부르며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다. 오랜만에 딸 내외가 온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두 사람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안방에 새 이불을 깔고 잠옷도 준비해 두었다. 정갈한 저녁상을 차리느라 분주했지만 얼굴에는 온통 미소가 가득했다. 모처럼 가족들이 모이는 날, 그 설렘과 기대감이 부엌 가득 퍼져 있었다.     


"여보, 거의 다 됐어?" 한 씨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향했다. 사위가 오는 날이라 평소보다 더 단정해 보였다. "네, 이제 준비 끝났어요. 당신이 애들한테 전화해서 어디쯤 왔는지 물어봐요?" 아내의 목소리에서 기대감이 느껴졌다. "그래, 그럴까?" 한 씨는 미소를 지으며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만날 딸내외 생각에 그의 얼굴에도 설렘이 가득했다.

이전 09화 기침이 옮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