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수아야"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수아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딸의 밝은 모습에 최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딸에 대한 그리움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하지만 이내 비참함이 밀려들었다. 누추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딸에게 보일 수 없었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최 씨는 한없이 미끄러지듯 무너져내렸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인생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는 후회로 가득 찬 눈물을 삼키며, 다시 술집으로 향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자책감에 술잔을 기울이는 것만이 그에게 남은 도피처였다.
가족과 연을 끊은 지 어언 40년이 흘렀다. 그 세월은 마치 깊은 심연과도 같았다. 딸과 아내는 이제 최 씨에게 생사조차 알 수 없는 타인이 되어버렸다. 한때는 필연처럼 여겼던 혈육의 정이 파산과 함께 무참히 끊겨 버렸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말이 이렇게도 잔인하게 느껴질 줄이야. 추억의 벽에 숱한 상처들이 돋을 대로 돋아나 있었다.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던 과거의 기억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파란만장했던 시간이 최 씨를 옥죄어 왔다. 그때의 최 씨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돈에 홀려 있었다. 돈이라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리고, 가족마저 저당 잡힌 그 시절. 최 씨는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최 씨는 한평생을 돈의 굴레에 짓눌리며 살아왔다. 자신을 옭아매는 그 굴레에서 단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파산 이후, 최 씨의 삶은 정부와 복지단체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삶은 스스로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거대한 시간의 물결에 이리저리 떠밀려 다닐 뿐이었다. 그 광활한 물결 위를 떠다니며, 최 씨는 문득문득 잃어버린 가족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병마가 그의 심신을 갉아먹을수록, 그 그리움조차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느껴졌다.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기도 버거운 처지였다.
육체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면, 정신마저도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펜대나 굴리며 세월을 보내던 인텔리였건만, 이제 최 씨는 막노동과 허드렛일로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지독하게 고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노동에 찌들어 쉴 새 없이 몸을 혹사시키는 최 씨의 삶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지듯이, 그의 존재감은 현실 속에서 바래져만 갔다.
그런 최 씨 앞에 한 씨가 등장했다. 한 씨의 모습은 마치 오래전 최 씨 자신의 젊은 날을 보는 듯했다. 욕망의 늪에 빠지기 이전, 순수하고 올곧게 세상을 마주하던 그 시절 말이다. 한 씨의 눈에서 최 씨는 지난날의 자신을 발견했다. 희망으로 반짝이던 눈동자,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활짝 웃던 입가. 그 모습은 지금의 최 씨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여보, 오늘은 무슨 일 있었어요? 많이 취하셨네요." 한 씨의 아내는 근래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던 남편이 오늘따라 유독 술에 많이 취해 돌아온 것이 이상했다. "아, 오늘 봉사활동이 잘 마무리돼서 그래. 자축 겸 술 좀 했지 뭐." 한 씨의 대답은 술기운에 느릿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묘한 감흥이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