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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뭉치 Jan 03. 2023

헤어질 결심에 필요한 것들

오늘은 고양이들이 집에 들어와 식구가 된 지 만 2년 되는 날. 건강 검진 주기가 다가와서 고양이들을 병원에 데려갔다. 그와 이혼을 결정하고, 고양이를 내가 거두겠다는 심산으로 혼자 고양이들을 병원에 데려가 건강 검진을 한 게 작년 1월 첫 주다. 눈 깜짝할 사이에 1년이 지났다.


우리 고양이들은 어릴 때 귀 진드기를 심하게 앓았다. 그 여파로 귀에 염증이 심해 귀 내시경 치료를 했고, 한 번의 치료가 충분치 않았는지 또 한 번 내시경을 하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병원비는 둘째 치고, 전신 마취를 하고 몇 시간 동안 병원에 있어야 하는 고양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다.


지난 귀 내시경은 재작년 초여름이었다. 다니던 집 앞 동물 병원은 귀 내시경 장비가 없어 차로는 30분, 대중교통으로는 1시간 정도 걸리는 병원에 가야 했다. 고양이들이 어렸고, 중성화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전신 마취를 해야 하니 걱정이 됐다. 치료 예약일이 다가오면서 컨디션 체크며, 금식 시간이며 이런저런 일들을 신경 쓰고 있는 나에게 그는 그날 칵테일파티에 가자고 제안했다. 고양이가 전신 마취를 하고 5시간 동안 치료를 해야 하는데 파티라니, 나는 너무 황당했다. 고양이가 전신 마취를 한 뒤로는 최소 하루 동안은 컨디션을 지켜봐야 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게 돌봐야 한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그는 그렇다면 자기 혼자 칵테일파티에 가겠다고 했다. 고양이는 내가 혼자 돌보면 된다는 거였다. 파트너의 그 말이 나에겐 많이 상처였다. 제일 연약한 우리 식구에게 제일 돌봄이 필요할 시기에 옆에 있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가 너무 야속했다. 그 일은 다툼으로 번졌고, 그 다툼을 하다가 파트너가 창밖으로 고양이 케이지를 던져 버린 거다.


싸움 끝에 결국 나는 고양이를 혼자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병원이 멀고, 나 혼자 케이지를 들고 가기엔 너무 힘이 드니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니가 쓸데없이 발레나 하면서 힘을 기를 생각도 안 하니까 돈이나 쓰고 남한테 폐 끼치는 거지 않냐"면서 내 개인 용돈으로 택시를 타라고 말했다. 지금 와서는 그 말이 나와 다투면서 꼬일 대로 꼬인 심정에서 나온 말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 당시엔 그 마음 따위 헤아릴 여력이 나에게도 없었다. 그는 그날 기어이 파티에 갔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그가 없는 밤 동안, 풀이 죽은 고양이를 혼자 돌보며 나는 마음이 너무 쓰렸다.


고양이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사이, 병원 근처 카페에서 치료가 끝나길 기다리며 열심히 부동산을 검색했던 기억이 난다. 그와 이혼하려고. 집이 당장 급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정말 혼자서 고양이들과 살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집을 열심히 찾아보고, 부동산에 문의 전화를 돌려보고, 통장 잔고를 몇 번씩 확인하고. 막막했다. 그 주에 집을 두세 군데 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일단 화해하자'였다. 그가 사과한다면 받아주기로. 그리고 그 사과가 진심임을 믿어버리기로. 그냥 눈을 감고, 내가 처한 상황을 외면해 버리기로.


그리고 오늘, 같은 카페 같은 자리에 앉아 시간을 고양이들의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와의 이혼은 그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헤어짐을 망설였던 그때 그 여자를 바라본다. 헤어질 결심을 하기엔 세상은 너무 위험천만해 보였다. 눈앞이 캄캄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혼 이후를 상상한다 하더라도 눈앞이 캄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헤어질 결심에는 많은 게 필요했다. 주거, 내 생활과 고양이 양육을 위한 적절한 생활비, 돌봄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시간과 기술, 주변 사람들의 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 외롭지 않을 자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는 게 마음이 편했다.


오늘 결제해야 하는 고양이 병원비는 167만 원이다. 이혼하고 올해 1월부터 매달 20만 원씩 고양이 병원비 명목으로 적금을 부었다. 중간에 무섬이가 장난감을 먹어서 위 내시경에 100만 원을 써버렸고, 잔액이 140만 원 남은 적금은 깨야 하며, 그러고도 모자란 돈은 카드를 긁어야 한다. 이혼을 하고도 내 현실은 여전히 캄캄하다.


고양이와 독립한 이후로 처음으로 산 아이템은 자동급식기와 유아차다. 이제 돌봄을 분업하거나, 무거운 케이지를 들고 함께 병원에 가줄 수 있는 파트너가 없으니. 지난해 제일 많이 의지한 물건들이 급식기와 고양이 유아차다. 이른 아침 고양이들을 유아차에 태워 집을 나선다. 이사한 집과 병원이 가까워 그나마 다행이지만, 동물병원과 인접한 지하철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이 지나가던 분이 도와주셔서 겨우 지상 위로는 올라왔지만, 동물병원까지 향하는 길은 또 하필 보도블럭이 어마어마하게 깨져 유아차 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고양이들이 탄 유아차를 끌면서, 아빠와 이혼하고서 일곱 살이었던 나와 한 살이었던 동생을 혼자 데리고 다녔을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도 이렇게 눈앞이 캄캄했겠지. 두 딸의 생이 오롯이 자신의 책임이 되던 날,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현관문을 잠가 두고서도 누가 쳐들어올까 무서워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던, 엄마의 회고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여자들이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 걸까. 엘리베이터, 잘 닦인 길, 도와주는 사람들의 손, 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동네. 이게 이렇게 큰 바램이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온갖 위험과 불확실성 가운데서 헤어질 결심을 한 / 하지 않은 / 하지 못한 모든 여자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어떻게든 함께 잘 살아남아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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