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현숙네 고향은 2백여 가구로 여느 시골 마을 중에서도 꽤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경계로 윗마을에는 홍씨, 아랫마을에는 현숙네 종친인 이씨들이 살았다. ‘윗담’, ‘아랫담’으로 불리기도 했던 동네는 두 성씨 간에 은근한 경쟁의식이 깔려 있어 먼 나라 이웃나라 같기도 했다.
지나친 라이벌 의식이 가끔은 적대적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 농촌은 가난에 허덕이며 궁핍한 생활에 놓여 있었는데, 현숙네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 끼니 중 한두 끼를 고구마나 수제비 등으로 해결하는 이들이 흔했다. 못 살다 보니 일거리가 없고, 일이 없으니 가난을 면치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겨울이 다가오면 남자들은 동네 사랑방에서 노름이나 윷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희한하게 두 성씨 간 장벽 없이 왕래하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노름이었다. 집단으로 원수가 되곤 하는 일도 그 때문이었다.
노름으로 돈을 잃고 끼니조차 없어 현숙네로 곡식이나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도 흔했다. 아버지는 그러한 사람들을 달래기도 나무라기도 했다.
“나무를 해서 팔든가… 아이들과 살 생각을 해야지!”
암울하고 우중충한 동네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초가집을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사람 몇 명이 겨우 지나다니는 비좁은 흙길을 리어카나 경운기 등이 다닐 수 있도록 넓힘과 동시에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포장하며, 마을마다 집집마다 전기와 수도를 들이는…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이나 다름없는 ‘새마을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잘먹고 잘살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혁명이었지만 당장 내 입에 밥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까지의 게으른 관성이나 타성에서 쉽게 벗어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동네 부역이 개개인의 이득으로 돌아간다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기엔 너무 먼 세계에서 살아온 그들이었다.
사람들의 의식 개혁이 먼저라고 판단했던 정부는 정신계몽 운동을 함께 펼쳐나갔다. 그 일환에 ‘4H’가 있었다. 명석한 머리(Head), 충성스런 마음(Heart), 부지런한 손(Hand), 건강한 몸(Health)을 일컫는 말로, 새마을운동을 이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군청지도과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4H와 새마을지도자들의 정신계몽 교육을 담당하게 된 현숙의 아버지는 직장에서의 업무와 별개로 동네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퇴근 후와 주말, 공휴일 등에 동네의 젊은 남자들을 집으로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새마을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해마다 볏짚으로 지붕을 이지 않아도… 고구마나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지 않고 쌀밥을 먹을 수 있는… 모두가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운동….”
아버지의 지난한 노력 끝에 따로국밥처럼 지내오던 이씨와 홍씨들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유별나게 아버지를 따르게 된 사람이 바로 석표 아버지였다.
동네에서 석표 아버지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윗담에 사는 그는 키와 체격이 보통 사람보다 껑충 큰 데다 시뻘건 흉터가 대각선으로 죽 그어진 것도 모자라 한쪽 눈이 온통 빨간색으로 뒤덮여 있어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아랫담 아이들은 그가 눈에 띄기라도 하면 ‘괴물이 나타났다!’며 달아나거나 숨기에 바빴다.
일찍부터 도시로 나가 공부했던 아버지는 윗담 사람들을 세세히 알지 못하다가 새마을운동의 일선에 나서며 윗마을 사람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게 되었다. 특히 자신을 따르는 석표 아버지를 안타까이 여기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군대에서 총알 오발탄 사고로 얼굴이 그렇게 되었으며, 외관상 안타까운 부분은 인정하나 눈, 코, 입의 기능이 모두 정상적이어서 원호대상자 자격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혐오스러운 얼굴 외관 또한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지는 정신적인 장애라며 이의 신청을 할 것을 종용하며, 이에 필요한 서류와 준비 절차를 하나하나 도와주었다. 석표 아버지는 원호청에서 배달된 서류는 봉투 개봉조차 않은 채 현숙 아버지에게로 들고 왔다.
아버지의 출퇴근길 오토바이 뒷자리에 석표 아버지를 태우고 다니는 일이 적지 않았다.
석표네를 비롯한 대부분의 농민들에게 5~6월은 고난의 시기였다. 지난가을에 수확했던 양식이 바닥나고 보리는 아직 여물기 전인 일명 ‘보릿고개’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심어놓은 벼가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절반조차 수확하지 못하는 일을 농민들은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농가 소득 증대가 가장 우선적인 새마을운동의 시발점이었는지 모른다. 가뭄에도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양수장 설치, 그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양수기 보급 확대, 홍수 방지를 위한 제방 등을 쌓아 자연재해로 일어나는 농작물 폐해를 막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벼, 보리, 밀 위주로 일차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농작물만 재배하던 범위를 벗어나 돈이 되는 다른 작물로도 눈을 돌리게 했다. 그 시범사업의 영역에 양잠이 있었다.
부잣집 논밭을 소작하고 있던 사람들은 벌레한테 뽕잎만 먹이면 돈이 된다는 소리가 너무나 달콤하게 들렸던지 너도나도 누에를 치겠다고 달려들었다. 뽕나무 심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현숙네 선산을 아버지는 석표네를 비롯해 몇 사람에게 무상으로 땅을 빌려주었다. 아이들은 많은데 자신의 땅뙈기라곤 거의 없는 석표네가 가장 많이 차지했다.
석표네에 무조건적인 선심을 쏟아붓는 아버지에게 엄마의 불평과 불만이 잇따랐다.
“나라도 구제해주지 못하는 게 가난인데, 우리 집 곳간 비는 줄은 모르고….”
“원호대상자가 되면 먹고사는 일은 걱정 없을 테니, 그때까지만 참게나.”
아버지와 석표 아버지의 기대와 바람은 산 넘어 산이었다. ‘건강 상태 이상무’로 제대를 하고 나온 터라 사고 당시를 재조사하여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원호청과 수없는 서류를 주고받으며, 읍내는 물론 서울까지도 오르내려야 했다. 어느 시절 어느 자리에서나 책임 회피를 위해 덮은 일을 다시 까발리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눈 밝고 귀 밝은 요즘 시절에도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70년대였으니.
이러한 제반 등에 석표네가 현숙네를 남다르게 우러르며, 아버지에게는 깊은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현숙의 가족들이 모르지 않았다.
석표는 딸만 일곱인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아들을 더 얻고자 했으나 석표 아버지보다 몇 살 연상인 그의 엄마 자궁 문이 닫혀 더는 낳을 수 없다는 소문이 공공연한 사실로 떠돌았다.
하늘이 내린 천금보다 귀한 자식이었으니,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질까, 석표 아버지가 아들을 혹처럼 달고 다니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훈장처럼 버젓이 앞세우고 다니는 모습은 동네 앞 정자나무의 존재만큼이나 고정된 모습 같기도 했다.
석표 아버지가 현숙의 집에 드나들 때마다 석표가 따라왔으므로 종현과는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자신의 아들을 종현과 친해지게 해주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아이들이 어른의 의도 내지 사심을 구별해가며 사귈 리는 만무했다.
아버지는 종현과 석표를 나란히 앉혀놓고 바둑과 장기를 가르치고, 책 읽기와 받아쓰기 공부를 놀이처럼 즐기도록 했다. 석표도 여간 똑똑하지 않아 현숙네 가족들이 귀여워하고 사랑스러워했다. 아버지 또한 그의 재능을 자주 언급했다.
석표 아버지가 두고 간 석표를 언니 친구인 영순 언니가 데리러 오면서, 언니와 영순 언니 사이도 각별해졌다.
맹목적이리만치 박정희 대통령을 추종하며, 의욕적으로 새마을운동에 앞장서는 아버지의 열정과 공로가 청와대까지 전달되었는지 대통령상까지 받기에 이르자 대놓고 시기 질투하는 세력들이 생겨났다. 엄마는 못내 불안해하며 몸조심을 당부했으나 아버지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경계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자연스런 이치라며, 그것을 상쇄하기 위해선 더 많은 봉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선한 끝에 악이 있을 수 없다’는 말도 자주 언급했다.
아버지의 사상과 철학은 옳고도 틀렸으며, 틀리고도 옳았다. 선과 악은 동떨어진 위치에 있지 아니하며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책임으로, 어느 겨울 퇴근길 뒤따르던 지프차에 의해 오토바이가 전복당하고 말았다.
선(善)의 길모퉁이, 도사리고 있던 악(惡)에게 목숨을 내어준 꼴이다.
아버지의 타계로 집안은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기도 전에 가족들은 또 다른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현숙네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빌려간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갚았다고 주장하며 엄마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가장 크게 뒤통수를 친 사람이 석표네였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그뿐만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망을 타살로 확신한 엄마가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은 한결같은 ‘단순교통사고’였다. 그때부터 엄마는 오로지 자식의 성공에 목숨을 걸었다. 시골 전답과 산을 정리하는 대로 배신자와 원수가 득시글거리는 지옥을 떠나기로 결심한 후, 갓 중학교를 졸업한 언니와 두 오빠, 그리고 남동생을 차례로 대구로 보냈다. 언니는 오빠들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한 직접적인 희생타였으며, 현숙은 시골 전답이 팔릴 때까지 엄마를 도울 간접적인 도우미였다.
당장 생계에 나서야 했던 엄마는 소작 준 전답을 돌려받고 부업에도 눈을 돌렸다. 현숙네 산에 시범으로 뽕나무를 심었다가 별 재미를 못보고 돌아선 사람들 것까지 석표네가 이용하고 있었는데, 그것만은 차마 양심에 걸렸던지 슬며시 내 주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얼음장 논에 서서히 물기가 번들거리며 논바닥의 진흙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엄마는 누에치기에 슬슬 시동을 걸었다. 매일같이 뽕나무밭으로 나가 잡초를 제거하고 가지치기를 한 뒤 거름을 주며 살뜰히 나무들을 보살피는 한편 집에서도 누에 들일 채비를 했다. 사랑채 내부를 양쪽으로 나뉘어 층층으로 단을 만든 뒤 위에다 두꺼운 마분지를 깔아놓았다. 중간에 사람 다닐 만한 통로만 겨우 남겨둔 채.
봄의 새싹들이 뾰족이 고개를 내밀고 올라오는 4월이 되자 엄마는 일찍이 면에 신청해놓은 누에알을 가져왔다. 꼭 검정깨처럼 생긴 알을 마분지 위에 슬슬 뿌려놓은 뒤 날마다 군불을 지폈다. 누에는 추우면 죽는다고 했다. 며칠째 미동조차 않던 알이 꼬물거리는 벌레로 변하는 모습은 신기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린 뽕잎을 잘게 다지듯이 쓸어 그 위를 덮어준 뒤 다음 날 들여다보면 어느새 뽕잎이 없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숙은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즐거웠다. 새벽 일찍 일어나 뽕잎을 따서 누에섶에 올려준 뒤 학교로 가고, 다녀온 후 채반에 떨어진 누에의 배설물을 치우곤 했다. 누에의 몸이 토실토실하게 어른 손가락 굵기만큼 커지고 빛깔이 유리그릇처럼 투명해지면, 그때부터 자신의 몸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며 스스로를 가둔다. 짙푸른 뽕잎과 눈부시게 하얀 꼬치의 대비는 성숙한 봄날 초록색 바탕에 솜털같이 하얗고 몽실한 꽃송이가 내려앉은 이팝나무처럼, 아름다운 평화가 느껴지기도 했다.
뽕잎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하얀 고치를 꽃잎 따듯 하나하나 집어 올려 다시 면사무소로 가져가 돈으로 바꿔오기까지…. 누에 치는 일은 단 한 순간도 힘에 부친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현숙의 유일한 즐거움이자 보람찬 노동이었다.
가을 날씨답지 않게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중간고사를 마친 현숙이 일찍 집으로 돌아와 사랑채를 들여다보니 누에 선반의 뽕잎이 휑하니 비어있었다. 현숙과 엄마는 무슨 일보다 누에 치는 일을 우선시했다. 잘 먹여야 상품(上品)인 고치가 만들어지고 좋은 값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가방을 던져두고 서둘러 뽕나무밭으로 달려갔다. 그날따라 한적한 뽕나무밭이 이상했다. 양잠을 많이 했던 석표네는 봄가을이 되면 식구 중 어느 누구라도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엄마가 특별히 괴로워했던 이유 중 하나도 매일같이 원수를 만나야 하는 일이었다.
가끔 고요와 적막이 어떤 대상보다 더 두렵고 공포스러울 때가 있다. 엄마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과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무성한 뽕나무들 사이에서 몹쓸 예감의 촉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뽕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설핏한 느낌으로도 남녀가 엉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의 용쓰는 신음이 싸우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쉬 판단이 서지 않아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아악!“
“사람 살려! 여기 이놈이 사, 사람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시나무 떨듯 하고 있는 현숙의 귀에 사내의 외마디 비명이 꽂힘과 동시에 엄마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들렸다. 급히 엄마를 부르며 현장으로 달려가자 남자가 허겁지겁 바지춤을 올리며 현장에서 사라졌다. 석표 아버지였다.
그 일로 오른쪽 팔이 부러진 엄마는 6개월 동안이나 깁스를 하고 있어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