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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획자 이형식 May 14. 2024

다시, 본질이다. 다시 기획이다.

인공지능의 시대, 기획자의 전성시대가 온다


10년 전이다. 나의 커리어는 「기획은 2형식이다」라는 책 출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는 10년차 기획자로서 느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작게 공유해보자는 단순한 발상이었다. 기획에 대한 작은 담론을 던질 수 있는 것 만으로 기뻤다.


뜻밖의 놀라운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반응해 주셨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기획의 본질은 문제-해결이다’, ‘문제 정의가 더 중요하다’, ‘기획력은 재능이 아니라 태도다’ 등의 ‘2형식 기획 담론’에 현업의 기획자들이 깊이 공감해 주셨다. 덕분에 절판되지 않고 10년째 스테디셀러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출간 당시의 2014년은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직후 대두된 디지털 기술과 인간 통찰의 창의적 융합사고에 관한 담론이 일던 시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창조경제와 인문학 열풍이라는 다소 변형된 현상으로 나타났지만, 자연스럽게 ‘기술’ 이면의 ‘기획’에 대한 화두도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여러 기업과 공공기관의 현업 기획자분들과 이 책을 매개로 소통과 영감을 주고 받은 시간들은 내 커리어를 넘어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기획은2형식이다


다시 10년이 흘렀다. 지난 10년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더욱 고도화된 시기였다. 수많은 기술기업들이 디지털에 기반한 놀라운 제품과 서비스를 손에 쥐고 세상에 출현했다. 스타트업도, 기존 기업도 디지털 전환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물론 아직도 80년대 영화 ‘백투더퓨처’의 예언처럼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세상이 오진 않았지만(서기 2015년이었다) 기술의 변화 속도는 어마무시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늘 그랬듯,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중요해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기술이 아니라 ‘기획’이다.


토스(TOSS). 지난 10년간 세상에 출현한 많은 기술기업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 가는 곳 중의 하나다. 토스는 창업가 이승건 대표가 8번을 실패하고 9번째 성공한 사업이다. “인류 사회를 진보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기술혁신이고 이를 지속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건 기업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승건 대표는 뼛속 깊이 ‘기술 신봉자’다. 하지만 기술 신봉자로서의 이대표 최고의 작품은 ‘토스’가 아니었다. 기술적 위대함과 섹시함의 냉정한 잣대로 보면 토스의 기술 레벨은 그의 모든 사업 아이템 중 가장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오늘의 토스를 있게 한 간편송금 기술은 조금도 새로울 것 없는 ‘계좌 자동이체 기술’이 핵심 모티브다(유니세프 기부금 계좌 이체 방식을 차용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반면에 그의 초창기 사업 중 ‘울라불라’라는 소셜앱의 기술은 무려 ‘핸드폰끼리 초음파 통신을 할 수 있는‘ 판타스틱한 기술이었다. 핸드폰에 있는 스피커와 마이크를 통해 초음파 소리를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게 발생시켜서 진짜로 핸드폰이 근처에만 통신하게 만드는 혁신적 기술. 마치 <좋아하면 울리는> 같은 웹툰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그런 꿈같은 기술. 1년이라는 시간과 수억의 돈을 투여해 기술개발에 성공한 순간 이대표와 동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제 세상이 뒤집어질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뒤집어진 건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고정관념이었다.


답은 기술이 아니라 기획이었다. 토스의 대단한 성공은 대단한 기술 덕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태생적으로 기술은 ‘내 입장’이고 기본적으로 기획은 내가 아닌 ‘상대방 입장’이다. “처절한 깨달음이었죠.” 이대표는 틈나는대로 업계에 이 값비싼 레슨을 전파한다. 본인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말라는 진정성이다.


[토스의 탄생] 기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기획에 집중하다


진정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은 기술이 아니라 기획이다. 기업의 ‘기(企)’는 기술의 ‘기(技)’가 아니라 기획의 ‘기(企)’다. 디자인(design)도 기술이라면 디자이너 출신으로 대성공을 이룬 배달의민족 김봉진 대표도 마찬가지다. 첫 사업은 보기좋게 망했다. 본인의 탁월한 디자인 기술을 십분 발휘하여 창업한 ‘수제 가구 사업’이었다. 배달 주문의 불편함이라는 고객 문제를 해결하는 중개사업은 우리 모두가 아는 초대박 성공이었다. 배달앱시장 1등 배달의민족의 기술력은 1등이 아닐 수 있지만(요기요가 1등일 수 있다) 기획력이 1등이라는데는 시장의 이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작금의 비즈니스 세상은 기술 만능주의에서 기획력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듯 하다.


- IT 기업임을 천명하고 출발한 에어비앤비는 인간 본연의 욕구인 ‘소속감(belonging)’이라는 가치를 파는 아날로그(?) 브랜드로 변신했다. 더 잘 나간다.

- IT 혁신을 우리 동네로 끌고온 당근마켓은 기획자를 채용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꺾고 다시 대규모의 기획자를 채용하기 시작했다.

- 쿠팡과 넷플릭스, 유튜브가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더 이상 기술력이 아니다. 스포츠 중계, 게임, 쇼츠, 라이브커머스 등 생뚱맞은(?) 기획력이다.


왜 그럴까. 왜 기획이 게임 체인저가 되었을까. 기술이 너무 발달해서다. 기술의 발전이 선을 넘어 기술의 고평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술의 변별력이 작아지는 순간 기획의 능력은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모든 기술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온실가스를 포집ㆍ이용ㆍ저장하는 ‘탄소중립 기술’같은 산업기술 등은 논외다. 메타버스, 웹3, 공간 컴퓨팅 등의 기술들도 아직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대중이 체감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픈AI의 챗GPT는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2016년 이세돌을 꺾은 알파고를 보고 ‘미래가 오고 있네’라고 느꼈는데 2023년 챗GPT를 경험해보고는 ’오늘이 미래네.‘를 느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대중 기술이다. 전세계 1억명이 사용하고 있다. 내 숙제를 시킬수도 있고, 기사를 요약하라고, 작곡을 해달라고, 요리 레시피를 제안해달라고 할 수도 있다. 임재범AI가 부른 아이유의 ‘좋은날’도 들을 수 있다. 마침 오늘 오픈AI가 보다 업그에이드된 GPT-4o를 새롭게 출시했다. 마이 갓! 텍스트·이미지·영상 통합형 멀티모달 모델로 이젠 정말 인간처럼 보고 듣고 말한다고 한다. 영화 'Her'의 AI운영체제 '사만다'가 드디어(?) 현실화되는 것이다. 아내와 별거하며 외로운 삶을 사는 주인공이 AI비서 사만다와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며 치유받고 사랑과 행복을 나눈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더 이상 허구가 아니다.


GPT-4o의 등장. 이제 무엇을 기획해볼까!


이런 초기술의 빅뱅시대에 기획이란 무엇일까? 기획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아마존 CEO인 제프 베조스의 말을 기억할 때다. 결국 ‘본질’이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10년 후의 변화를 찾지 말고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그의 말은 기획자라면 가슴으로 새겨 들어야 한다. 기술이 얼마나 발달하든,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든 세상의 문제와 해결을 하려는 인간의 가치 지향적 본능과 창의적 열망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획자는 세상의 변화와 트렌드를 민감하게 캐치해내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기획자는 ‘본질을 보는 사람’인 것이다. 본질은 ‘생각의 힘’이다. ‘생각의 힘’이라 쓰고 ‘기획력’이라 읽는다. 영국 옥스포드대의 마이클 오스본 교수는 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품이 ‘창의성’이라고 언급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라질 직업 리스트에서 거의 꼴찌(?)가 ‘기획자’인 셈이다.


당신에게 스티브 잡스는 무엇인가? 창업가? CEO?

나에게 잡스는 ‘기획자’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본질을 보는 사람, 기술을 사랑하지만 도구로 보는 사람. 기술(Technology)과 인문학(Liberal Arts)의 교차로에 서 있는 기획자였다. 그는 제품 회로 하나 설계하지 않았고 프로그래밍 한줄, 디자인 하나 작업하지 않았지만 매킨토시와 아이폰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것을 기획했기 때문이다.


기획자로서의 잡스를 탐구하고 싶다면 영화 스티브잡스를 강추한다. 커쳐 주연의 쓰레기 2013년작이 아니라 대니보일 감독의 2016년작이다.


스티브 잡스는 대중 기술의 계보 속에서 대중 기획을 만들어 온 대중 기획자다. 역대 메이저 기술의 계보를 살펴볼 때, [(1) PC(1980) - (2) 인터넷(1995) - (3) 모바일(2007)] 메이저 대중 기술은 대략 15년의 간격을 두고 등장하는 패턴임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메이저 기술이 등장하면 기획의 전성기도 함께 열렸다는 것이다. 기술과 기획은 상생의 관계다.


이제 모바일(2007) 이후 4세대 메이저 기술, 생성형 인공지능(2022)이 등장했다. PC, 인터넷, 모바일로 이어지는 모든 기술 세대에서 매킨토시, 아이팟, 아이튠스, 아이폰 등 최고의 기획력을 발휘했던 잡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히 4세대 기술인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또 하나의 혁신 기획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없다. 하지만 전세계, 각 분야의 많은 기획자들이 그 대신 4세대형 창의 기획을 시도할 것이다.


내가 일하는 마케팅 씬도 생성형AI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 한땀한땀 끌로 파며 대응하는 마케팅 운영은 AI로 인해 자동화된다. 몇날 며칠 촬영하고 편집하며 개고생하며 만드는 고퀄리티 영상도 SORA로 인해 뚝딱 만들어진다. 챗GPT가 코딩도 대신 해준다. 이젠 골치아픈 코딩을 몰라도 홈페이지도, 쇼핑몰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마케터와 크리에이터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무엇일까.


‘기획력’이다. 이제 답은 인공지능이 기가 막히게 찾아준다. 그럼 인간은? 문제를 찾아야 한다. 문제 의식을 갖고 질문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챗GPT를 잘 활용하는 비결도 질문의 구조를 잘 짜는 것이다. 제아무리 빅데이터와 슈퍼컴퓨터를 갖고 있어도 좋은 질문을 할 수 없다면 좋은 답을 얻을 수 없다. 문제를 찾는 일, 질문을 하는 힘은 인간 고유의 통찰력에서 나온다. 그 통찰력이 기획의 핵심 요소다.


10년 전 나는 「기획은 2형식이다」에서 P(문제)와 S(해결)라는 2개의 통찰코드를 제시했다. 그리고 P코드와 S코드로 코딩하는 기획사고법을 ‘플래닝코드’라고 명명했다. 문제를 찾고 정의하는 P코딩의 과정이 플래닝의 75%라고 주장했다. 사실 나의 ‘플래닝코드’는 잡스의 기획법에서 추출한(?) 코드다. 그가 남긴 거의 모든 기획 프로젝트들의 과정을 파헤치고 분석하여서 그의 생각 코드의 엑기스를 귀납적으로 추출했다.


잡스의 P-S


생각이 많으면 득이 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잡스는 늘 심플하게 생각했다. “진짜 문제가 뭐야? 해결책이 뭐야?” 단 2개의 플래닝코드였다. P코드와 S코드로 ‘사고하고-회의(논쟁)하고-기획서 쓰고-프리젠테이션하고-실행했다‘. 비단 잡스 뿐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이승건, 김봉진, 제프 베조스 등의 기획자들도 모두 플래닝코드로 생각하고 일한다.(해결책보다는 문제정의에 훨씬 관심이 많다 -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 결국 해결하고야 만다) 너무 딴 세상 사람들 얘기라고?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 주변의 소위 일 좀 하는 기획자들을 은밀히 관찰해보라. 모두 P코드와 S코드의 원리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그게 당신일 수도).


P코드와 S코드의 원리


지난 10년간 현업에서 강의에서 플래닝코드를 전하고 소통해왔다. 실제로 이 기획 코드가 현업에서도 성공적으로 워킹한다는 것을 목격하고 경험해 왔다.


당신은 기획자인가.

기술의 발전이 창궐하여 상향 평준화가 된 지금, 4세대 메이저 기술인 생성형 AI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지금, 그래서 역설적으로 기획자의 전성기가 시작된 지금, 다시금 기획의 본질과 담론을 함께 나누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기술의 빅뱅시대,

다시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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