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은 계획의 반대말이다
‘기획(Planning)’과 ‘계획(Plan)’은 다르다.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제대로 구분하는 사람도 잘 없다. 현업에서 이 용어들은 혼용되어 사용된다. 현장에서 ‘사업 계획을 한다’와 ‘사업 기획을 한다’는 사실상 동의어다. 계획과 기획의 용어 구분은 교과서에서나 기록된 이론적인 구분으로 치부되고 있다.
교과서적인 용어 구분은 이렇다.
- 기획은 ‘전략’과 ‘방향성’, 계획은 ‘전술’과 ‘실행’
- 기획이 ‘숲’이라면, 계획은 ‘나무’
- 기획이 ‘설계도’라면, 계획은 ‘일정표’
- 기획은 ‘Why’의 과정, 계획은 ‘How’의 결과
등등
한마디로, ‘계획’은 ‘기획’의 ‘하위개념’이자 ‘부분’이라는 말이다. 사전적으로 ‘기획 = 계획의 도모’ 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하면 우리의 뇌 속에서 용어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어진다. 당신은 이 교과서적 용어 정의에 일말의 인사이트라도 느낄 수 있는가. 현장에서 계획과 기획이란 용어가 사실상 구분없이 혼용되어 사용되는 이유다.
진실을 말하겠다. 진짜 용어 구분은 이렇다.
계획과 기획은 반대말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최근 수년간 중단되었던 전사 체육대회를 재개한다고 하자. 당신은 인사팀 실무자다. 어떻게 체육대회를 기획하겠는가?
- 먼저 ‘체육대회 날짜’를 잡는다.
- ‘장소’와 ‘대관비’, ‘교통편’을 알아본다.
- ‘운동종목’을 선정하고 ‘팀’을 구성한다.
- ‘점심메뉴‘와 ’상품들‘을 고른다.
- 사장님의 ’훈화 스크립트‘를 작성한다.
이렇게 당신은 일사천리로 후딱 일을 처리한 후 ‘나는 역시 일잘러야!’라며 스스로 뿌듯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식의 체육대회가 구성원들에겐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와 유사한 방식의 체육대회는 전국에 100개도 넘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 내에서 당신이라는 인재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기획에서 당신이 증명한 사실상 유일한 가치는 ‘스피드’이기 때문이다. 물론 ‘효율성’이란 기업의 핵심가치 중 하나이지만 ‘붕어빵 기획’을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 특기인 기획자는 가장 ‘빠르게’ 대체될 수 있다.(챗GPT가 당신보다 빠를 것이다)
이 기획안에는 당신의 관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당신이 한 것은
‘기획’이 아니라 ‘계획’이다.
당신이 계획이 아닌 ‘기획’을 한다면
전사 체육대회 과제에 이렇게 접근할 것이다.
- 먼저, ‘회사에서 체육대회는 왜 하는거지?’, ‘중단되었던 체육대회를 올해 왜 굳이 재개해야 하지?’라는 질문으로 생각을 시작한다.
- 그리고 체육대회가 끝난 직후의 그림(End image)을 그려본다. ’이 체육대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얻어야 하는 결론은 무엇이지?’라는 질문들로 생각을 심화시킨다.
-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 처음으로 돌아가 그 결론을 얻는데 있어 부적합한 운동 종목 및 프로그램을 날리고 결론에 부합하는 운동 종목과 프로그램을 선정한다.
- 결론에 부합하는 팀 구성, 장소 선정, 프로그램, 점심메뉴, 상품 등을 선정한다.
두 접근방식의 차이점을 간파했는가? 18도의 차이가 아닌 180도의 차이다. 기획과 계획은 사고방식의 메커니즘으로 보면 정반대의 패턴인 것이다.
‘계획적 사고’는 순차적으로 한다.
시작(A)에서 끝(Z)으로 간다.
즉 A부터 Z까지 정해진 순서대로 한발 한발 전진하는 매뉴얼적 사고의 방식이다. 통상적이고 천편일률적인 결과물이 생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획적 사고’는 역순으로 한다.
끝(Z)에서 시작(A)으로 간다.
끝은 ‘결론’이다. 지금 나는 시작점에 있지만 끝점(Z)에 있다고 가정하고 내가 원하는 끝의 그림(End image)을 가설로 그린다. 그게 ‘결론‘이다. ’결론(Z)‘은 시작점(A)에서 바라보면 달성해야 할 ‘목적’(purpose)’이 된다. 그 다음, ‘결론’이라는 ‘목적’에 수렴하도록 Z부터 A까지 모든 정보를 의도적으로 재구성한다. Z에서 A로, 역순으로 가는 기획적 사고의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점심 메뉴 정하고 데이트 코스 짜고 여행 플랜 짜는 것도 모두 ‘기획’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일상에서 늘상 하고 있는 것이 기획이니 쉽고 만만하게 보라는 조언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기획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잘 할 순 없다.
역순의 사고과정 없이, 즉 목적과 의도 없이 그냥 점심 메뉴 고르고, 데이트 코스를 짜고, 여행 일정을 짠다면 그건 기획이 아니라 계획일 뿐이다. 계획을 아무리 반복한다해도 기획을 잘 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기획보다는 계획을 주로 수행해 왔다. 학창시절 방학만 해도 그렇다. 방학을 기획하지 않고 계획했다. ‘방학 생활 계획표‘는 있어도 ’방학 생활 기획표’라는 건 없다. 10시 취침, 7시 기상, 운동, 부모님 돕기 등은 꼭 들어간다. 물론 절대 실천하지 않는다. 모든 아이들이 천편일률적인 ‘방학 생활 계획표‘를 만들었다.
일상에서 계획하는 게 습관이 된 우리는
인생도 기획이 아닌 계획을 하곤 한다.
당신은 결혼을 계획하는가
기획하는가
‘결혼 계획’이란 말은 있어도 ‘결혼 기획’이란 말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계획’하기 때문이다.
a. 이 정도 나이에는 결혼해야 돼.
b. 키는 이 정도, 나이는 저 정도,
c. 연봉은 이 만큼, 직업은 이 정도,
d. 성격은 이렇고, 가정 환경은 저렇고,
e. 예식장은 여기, 웨딩 드레스는 이거,
f. 신혼여행지는 저기, 신혼집은 저곳,
g. 블라블라
h. 블라블라…
위 생각의 프로세스가 별 이상할 게 없다고 느낄지 모른다. 우리는 대체로 결혼이란 대상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A에서 Z로의 순차적 계획 사고의 전형이다. 전형적이고 천편일률적인 결혼의 상들이 양산된다. 결혼의 본질이 실종된다. 우리나라 이혼률이 OECD 1위인 이유다. 결혼을 ‘계획’한 대가다.
결혼도 ‘기획’해야 한다.
철학자 니체가 말했다. 저 사람과 결혼해야 하느냐 마느냐 고민을 할 때, 딱 한 가지만 생각해보라고. 만약 저 사람과 결혼을 했다 가정하고 세월이 흘러 내 인생의 마지막 황혼기에 저 사람과 ‘대화’가 통할지, 안 통하지를 보라고 말이다. 결국, 끝(Z)에서 시작(A)으로 생각하라는 거다. 기막힌 통찰이다. 기획적 사고다. 물론, 인생의 끝에서 그리고 싶은 결론(End image)에 정답이란 없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돈‘일 수도, 누군가에겐 그것이 ’가족‘일 수도 있다. 니체에겐 ‘대화’였을 뿐이다. ‘결혼’을 바라보는 기획자의 가치관과 관점이 드러난다.
이렇듯, 기획적 사고는 천편일률적인 결과물을 양산하는 계획적 사고와 다르게 ‘다양한 관점’의 다양한 기획안(?)들이 도출된다. 기획적 사고의 미덕이다. 기획은 우리의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든다.
z. 결혼에서 중요한 건 ‘경제적 능력’이나 ‘외모’, 성격‘일 수도 있지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 부부간 ‘대화’가 아닐까 해. 저 사람과 결혼해서 노년에도 계속 대화가 통할지 아닐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가장 중요해!
a. 저 사람과 노년에도 ‘대화’가 통할지 검증하려면 지금 이 사람의 ‘~~~한 점들’을 봐야겠구나.
반면, ‘~~~한 점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겠네.
어떤 사람들은 결혼(wedding)을 계획한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marriage)을 기획한다.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훗날 미국 대통령까지 역임한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런 명언을 남겼다.
"Plans are Nothing. Planning is Everything.”
전쟁이라는 것이, 계획(Plan)대로 되진 않지만
기획(Planning)하는 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말에 덧붙여, 내 식대로 의역해본다.
“계획(plan)하면 쪽박(nothing)차고,
기획(planning)하면 대박(everything)난다.
그러니,
계획하지 말고, 기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