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코드(4) - 라인(Line)을 설계하라
이에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재판관 만장일치로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기억하시는지. 불과(?) 7년전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선고였다. 온국민이 TV 앞에서 떨리는 가슴 부여잡고 선고 결론에 귀를 기울였다. 선고 요지를 낭독한 이는 헤어롤로 유명해진 이정미 헌법재판관 권한대행이었다. 이 광경이 새삼 떠오르는 요즘 시국이다. 대한민국은 몇 달 후 이 비극적이고 불편한 상황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두 번째이니까 이번 판결은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을까. 뒤집어 말하면 7년 전 재판관들은 부담이 훨씬 컸을 것이다. 누구라도 반론의 여지가 없도록, 모두에게 납득이 되도록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어야 했다. 결과는 깔끔하고 통쾌했다. 누구도 헌재의 판결에 토를 달지 못했다. 재판관들은 훌륭하게 어려운 숙제를 해냈다. 결론코드를 잘 설계했기 때문이다.
기억하시는지. 2017년 판결 당일 오전에 낭독한 이정미 권한대행의 선고요지와 오후에 배포한 결정문은 같은 내용이지만 글의 구조가 달랐다. 의도가 있었고 이유가 있었다. 결론은 모두가 아는 ‘대통령의 파면’. 선고요지 낭독문은 결론을 마지막에 배치하는 미괄식인 반면, 결정문은 결론을 도입부에 배치하는 두괄식이었다. 같은 결론을 왜 다르게 배치했을까? 임팩트 때문이다. 결론은 반드시 극적으로 임팩트있게 전달되어야 한다. 매가리 없이 등장하는 결론만큼 쓸 데 없는 것은 없다. 결론을 맨 앞에 배치하는 두괄식이 임팩트가 클까, 결론을 끝에 배치하는 미괄식이 임팩트가 클까? 그때 그때 다르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기준은 있다.
기준은 역시 청중이다. 청중의 자세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상대가 내 말에 충분히 집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두괄식보다 미괄식이 임팩트가 크다. 일반적으로 경쟁 비딩이나 입찰 PT의 문서 구조가 미괄식인 이유다. 그런 자리는 고객사가 기꺼이 시간을 내어 나의 제안 내용을 끝까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탄핵 판결도 마찬가지다. 온국민이 판결문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초집중, 초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반면, 언론보도를 목적으로 배포되는 결정문에 대한 청중의 상황과 자세는 다르다. 주위가 산만하다. 뉴스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청중은 한 기사를 끝까지 읽을 집중력을 갖기 힘들다. 결론이 바로 보이지 않으면 즉시 다른 기사로 스위칭해 버린다. 따라서 기사 기획에서 두괄식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뉴스나 기사의 두괄식을 특별히 헤드라인(Head line)이라고 부르는데, 완성된 글의 논리 구조는 각각의 라인(Line)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장 머리가 되는 첫 라인에 결론을 배치하라는 의미다. 흥미로운 사실은, 결론이 영어로 버텀라인(Bottom line)이라는 점이다. 즉, 결론이라는 놈은 사실 태생이 최하단의 라인이고 미괄식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윗 라인들에서 이유와 근거를 말하고 최하단 라인에서 “결론을 말씀드리자면…”이라고 말하는 미괄식이 지극히 순리적인 방식인 동시에 임팩트를 극대화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순리를 거스를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라는 말은 두괄식의 임팩트를 만드는 방식이다. ‘결론부터’라는 말 자체가 ‘결론’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상단(Head line)으로 역행하여 올린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뉴스나 기사처럼 시원하게 헤드 라인에서 결론부터 말하고 하위 라인들에서 이유와 근거를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결론을 뒷받침하는 이유의 순서와 배치도 중요하다. 각 이유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내러티브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2017년 선고 낭독문과 결정문의 사유의 순서와 배치는 서로 다르다. 글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내러티브가 있는 글과 없는 글이다. 내러티브가 없는 글은 지루하다. 반면 내러티브가 있는 글은 쫄깃하고 흥미롭다. 기획서나 보고서같은 비즈니스 문서도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아니, 필수다. 문서의 수준과 품질을 좌우한하는 것이 곧 내러티브다. 문서의 내러티브를 만드는 방법은 이유들간의 관계 설정이다. 관계 설정은 ‘접속사’를 활용한다.
2017년 이정미 권한대행이 낭독한 미괄식 결정요지에는 앞뒤 문장의 내용을 전환하는 접속사인 '그러나'가 총 4번, '그런데'가 총 3번 사용되었다. 덕분에 마지막 결론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흥미로운 반전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심장이 쫄깃해졌다)
“세월호 사건은 모든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고통을 안겨 준 참사입니다. ‘그러나’ 피청구인이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는 등의 행위의무까지 바로 발생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 권한을 행사해야 하고, 공무 수행은 투명하게 공개하여 국민의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그런데’ 피청구인은 최서원의 국정개입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부인하며 오히려 의혹 제기를 비난하였습니다.”
2017년 탄핵선고 낭독문과 결정문의 사유 순서와 배치의 공통점도 있다. 결론에 바로 붙어있는 사유는 둘다 ’사인(최순실)의 국정개입 허용과 대통령 권한남용‘이었다. 의도적이었다. 모두 결론의 임팩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작은 소망이 있다. 내년 봄 헌재 판결은 두괄식으로 말해주면 안될까. 이유와 근거는 이미 너무 명확하니까. 궁금한 것은 오직 결론이다.
국민들이 듣고 싶은 말은, “자, 이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가 아니라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이다.
결론코드를 잘 설계해야 한다.
헌재의 문서 기획력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