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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스포인트 Sep 27. 2022

퇴사 후 잘나가야 멋진 거지

나도 잘나가고 싶어.

7년 전쯤 있었던 일로 기억한다.

대학 후배가 다니던 공기업을 3년 만에 그만뒀다.


안정적이고 돈도 많이 주고. 복지도 제법 좋은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후배는 그곳에 들어가려고, 나랑 같은 시기에 서울로 올라가 학원에서 몇 달간이나 고시원에 살며 함께 공부했었는데.

힘들게 들어가서 취직이 힘든 시기에 그만두고 나오다니.


술이나 사 달란 후배의 말에 나는 오랜만에 그녀와 만났다.


후배는 거품이 가득 어린 맥주 한 컵을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아저씨들 상대하기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어.”


라고 고백했다.

그때가 후배 나이 곧 30이 되기 전이었다.


“이제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냥 공무원 시험이나 보려고. 일반 기업 입사하기엔 늦은 나이잖아.”


후배가 다니던 공기업에서는 자신들보다 직급이 높은 그녀의 말을, 기술직 아저씨들이 똘똘 뭉쳐 무시하고 따르지 않기 일쑤였다고 했다.

그러다 사고가 나 결국 책임을 뒤집어쓸까도 두려웠단다.


힘들어 하는 후배에게 상사는 이런 조언을 해줬다고 했다.


“애교도 좀 부려보고. 살살 달래봐. 아저씨들은 그런 거 좋아해.”


애교 부리려고 직장 왔나.

후배의 무뚝뚝한 성격에 그런 짓은 도무지 하기 힘들었다고.

사회생활이 대체 뭔지.

회사에서는 일만 잘하면 되었지, 성격까지 바꿔야만 하는 건지.


나는 말없이 그저 듣기만 했다.

그녀의 괴로움과 아픔이 구구절절 이해됐고 공감이 가서.


“멋지네. 용기 있다. 퇴사한 거 축하해!”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할 그녀에게,


‘나는 더 힘들어. 우리 선배들이 얼마나 진상인 줄 알아?

자기들은 술 좋아하는 부장님이 부르면 가기 싫어하면서 대신 날 보낸다니까.

그러면서 뒤로 욕해. 신입이 술만 좋아한다고.’


이런 속내를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나 역시 남초 회사에서 뜬금없는 소문에 시달리며 정신과 몸이 피폐해졌던 터라.

멋지다는 내 말에 후배는 이렇게 답했다.


“멋지기는. 퇴사 후 잘나가야 멋진 거지.”


그래. 그건 맞지.


그때 후배의 말이.

나는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난다.


그래. 퇴사 후 잘나가야 멋지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였다.


나처럼

‘몰라, 앞으로 잘 되겠지.’

이런 긍정적인 마음만 가지고 있는 모습은 전혀 멋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던 후배는 1년 만에 9급 공무원에 합격했다. 그리고 아직도 잘 다니고 있다.

아마도 전 직장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공무원 생활은 견딜 수 있는 내성이 생긴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주 가끔.

전 직장 상사들에게 전화가 온다.

잘 지내냐며. 요새 어떻게 사냐며.


나는 그저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계약된 일 하면서 거주지까지 옮겼다고.


물론 정확히 내가 뭘 하며 사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한번 입을 잘못 놀렸다간 전 직장에 뭐라 소문이 날지 안 봐도 훤했으니까.

어쩌면 다른 사람들 입을 통해 내가 뭘 하는지 이미 듣고 떠보려고 전화한 걸 수도 있겠지만.


퇴사 후 잘나가야 멋진 거라면.

난 멋져지고 싶지만 전 직장 사람들에게만큼은 잊히고 싶다.


과거 직장을 다닐 때 퇴직하신 선배들의 근황을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나처럼.

그들도 나를 그렇게 잊어주기를 바란다.


전 직장 사람들이 다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좋은 사람들의 수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뿐이었다는 거.


한번 사는 인생, 내 주변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채우고 싶다.


그게 고액 연봉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프리랜서 생활을 택한 내 욕심이었다.



오늘의 좋은 일.

요즘 글이 술술 잘 써진다.

이러다가 출판사 편집자님에게 약속한 기한보다 더 일찍 내 소설을 보내드릴 수도 있을 거 같다.


잠들기 전에도 두근두근한다.

내일은 또 어떤 재밌는 내용을 적어보지? 이런 상상을 하며.


집 앞 공원은 가을이라 걷기 좋은 날로 변했고, 덥지 않으니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이런 편안한 날이 부디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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