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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Feb 10. 2023

잡채

2016년 명절 다음날, 친정에서 처음으로 잡채를 만들었다.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엄마와 여동생 가족이 최고의 맛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차례 때 올렸던 북어포가 보이길래 북어포를 잘게 찢어서 물에 살짝 담갔다가 꺼내 꼭 짠 후에 양념에 종종 버무린 반찬도 인기였다.


처음인 것 같다. 친정에 가서 음식다운 음식을 만든 것이. 명절에 친정에 가면 내 몸을 쉬어주고, 여동생과 새벽까지 왕수다를 떨고, 엄마와 올케언니들이 만든 음식들을 매끼 데워서 먹기만 했었으니까. 여동생과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갑자기 동생이 내게 부탁을 했다.


"언니네서 먹었던 잡채가 먹고 싶어. 다음에 만들어줄래?"


나는 오케이를 하고 남은 이야기를 더 나누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8시였다  갑자기 동생이 먹고 싶다던 잡채를 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물으니 슈퍼마켓이 9시 반에 문을 연다고 했다. 시간이 되자마자 동생과 같이 나가 잡채에 들어갈 재료들을 사 왔다. 늘 하던 대로 쉽게 잡채를 만들었다. 여동생이 어디서 들었다던 '물이 끓기 시작하면 당면 넣고 11분 있다가 꺼내기'가 최고의 당면 면발을 만들어주었다. 하나하나 정성껏 볶아낸 재료에 삶은 당면을 넣고, 진간장과 황설탕과 후추와 참깨를 넣어 버무리고 간이 딱 맞은 후에 참기름으로 마무리를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동생이 혼자 만들 수 있도록 설명을 자세히 하면서 만들었다. 2주에 한 번씩 동생네 놀러 오시는, 홀로 되신 시아버님께 맛있는 잡채를 해드릴 수 있을 정도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 어르신도 지금은 아내 곁으로 떠나셨다.


난 음식을 잘 만드는 편이다.  시누님이 요리사여서 배운 노하우도 있고, '음식은 사랑'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기에 음식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시집와서 배운 그 맛있는 음식들을 친정에 가서 만든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명절 늦은 밤, 아주 가끔 라면을 끓여준 것 말고는.


친정에서 음식을 안 하는 건 보통 여자들이 다 비슷하겠지만, 나는 결혼 이후 온통 시댁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살아 친정에 뭔가를 할 여력이 없었다. 돈으로 바로 살 수 있는 가전제품을 바꿀 시기가 되면  바꿔드린 게 그나마 우리 부부가 한 일이다. 친정에 가서는 피곤한 모습을 자주 보여드리고, 열 번이 넘게 병원에 입원하는 모습을 보여드렸으니 정말 불효 중에 사이 불효를 하고 살았다는 걸, 아버지 돌아가시고 깨달았다. 그걸 깨닫는 순간 차 안에서 30분 동안 통곡을 한 적이 있다.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셨던, 그럼에도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아픔을 생각하며 말이다. 어쩌면 눈물이 많은 분이셨기에 남몰래 큰딸을 생각하며 우셨을 것만 같다.


난 결혼 후 조화점을 잃었다. 오로지 시댁, 시댁이었다. 가난하고 상처 깊은 시댁에 온기가 되고 싶었다. 보통의 가족처럼 만들고 싶었다. 서로 축하해 주어야 할 생일 모임조차 없던 곳에서 사랑을 싹 틔우고 싶었다.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다고 믿었다. 시댁 식구들을 마음으로 품고 사는 게 내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복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시어머님 사랑도 듬뿍 받았고, 남편이 알아주고 고마워했다. 그 마음이 치매 걸린 우리 엄마에게 고스란히 사랑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형님의 마음은 내 맘 같지 않았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 동서가 부담스러웠고(비록 당신이 시동생에게 부탁한 일이었지만) 미안함에 나와 우리 가족에게 잘해주셨던 아주버님을 곱지 않게 보셨다. 그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형님은 어머님이 돌아가시자마자 과감히 인연을 끊고 맏며느리 역할을 벗어버렸다. 아주버님도 함께 사라지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가족을 몇 년 동안 본 적이 없다. 자랄 때 대화 없이 자랐던 형제는 그 이후 따로 만남도 없이 살고 있다. 형제끼리라도 만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지만, 남편은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다. 윤활유가 빠진 뻑뻑한 형제 관계는 그리 쉬어 보이지 않는다. 결혼 이후에는 넷이 부부동반으로 만난 적도 많았는데 말이다. 남편을 향한 사랑에 측은지심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또 그 마음이 생긴다. 그저 따뜻하게 이 남자를 많이 사랑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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