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든다는 말은 사계절이 바뀌는 걸 알고, 우주의 섭리를 깨치는 것이라고 한다. 정말 어마어마한 말이 아닌가. 앞날이 막막하여 매일 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누군가는 봄이 올 거라고 말할 것이다. 게으르고 나태한 누군가에게는 씨를 심어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지나친 열정에 에너지가 고갈되려는 누군가에겐 곧 결실을 맺을 거라고 위로할 것이다. 풍성하고 여유로운 삶에 만족을 넘어 교만한 누군가에겐 삶을 마무리하기 전에 물질과 마음을 나누어보라고 슬며시 조언할 친구도 있을 것이 것이다.
우리 인생, 어느 것 하나 여기에 걸리지 않는 일이 있을까.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분명히 적을, 이 나이를 살아가면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셀 수 없이 나를 스쳐간다. 가장 최근의 일로, 남편을 원망하는 시간으로 무척 괴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건강을 잃어 십여 년 전에 학교를 퇴직했음에도 아직도 자주 아프고 울화병 증세로 힘들 때가 있다. 오랜 시집살이를 했어도 분가 이후 어머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내 사랑이 되고 내 그리움이 되셨지만, 난 여전히 자주 아픈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게 화가 났다. 오랜 세월 몸과 마음이 아팠으니 치료하는 시간도 길게 잡아야 한다는 한의원 원장님 말씀을 듣고, 초등학생처럼 그분이 정해주신 몇 가지 생활규칙을 실천하며 지냈는데, 내가 왜 이 나이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 생각이 치고 올라오면서 남편에 대한 미움이 솟아올랐다.
"왜 나를 지켜주지 못했어? 왜 내가 힘들 때 방관했어? 고생 많으신 어머님 모시자고 했을 때 난 착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그러자고 한 사람이야. 따로 살면서도 죽어도 못 모시겠다는 형님과 그런 아내를 지켜주려고 한 아주버님을 생각해 봐. 6년을 모시다가 힘들어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은 사람에게 어머님 안 모시면 이혼한다는 그 말이 얼마나 내 가슴을 아프게 했을지 알아? 자기 여자 하나도 못 지킬 사람이 왜 결혼을 해서 한 여자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렸어?"
말이 아니었다. 화산 폭발이었다. 이혼을 안 한 것도, 가여운 어머님 삶이 안쓰러워 그래도 버티고 버티고 산 것도 나 자신의 선택이면서도, 난 모든 것을 남편 탓이라고 말했다. 울화병은 정말 무서운 병이다. 평소에는 편안하고 사랑이 흘러넘치다가, 어느 순간 발작을 하듯이 증세가 올라온다. 그러니 나도 괴롭고 듣고 있는 남편도 얼마나 괴로웠을까.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야 하는데, 순리를 거스르니 그게 곪아 터진 것이리라.
조금씩 조금씩 철이 드는 느낌이다. 이해불가의 사람들이 조금은 이해가 가고, 누가 누구를 함부로 시비분별하며 사는 게 그닥 옳아 보이지 않는다. 남의 옷차림새에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고, 인성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면 자라온 환경 탓일 거라 여기고, 내가 너무 힘들다 싶으면 거리 두기를 한다. 그 무엇보다도 남편 마음이 헤아려지고 있다. 분명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마음이 뭔지는 읽힌다. 자기 아내를 평범한 사람이기보다는 철인이기를 바랐고, 어찌 보면 어머님뿐만 아니라 시댁 식구 전체를 품고 사는 엄마 역할을 하길 바랐던 것 사람! 상처 깊은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해 달라고, 보듬어 달라고 한 사람! 나 또한 수행자처럼 사명감을 갖고 그 역할을 감당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내가 허물어지는 것은 방치한 채 나를 몰아붙이기만 했다. 너 하나만 참으면 된다고.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과 만나는 일, 그 안에서의 무수한 선택들! 그 선택으로 내 삶이 만들어진 것이니 그 누구를 탓하랴! 며칠 전 모임에서 선배 언니가 내게 해준 말이 있었다. 들을 땐 마음이 좀 아팠지만, 나는 언니 말이 맞다고까지 했다.
"알지? 모두 너의 선택이었다는 거. 남 탓으로 돌리면 병이 낫지 않아. 원인을 너에게서 찾아야 치유가 빨리 일어나거든."
철이 든다는 건 우주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니 보통의 사람은 그 경지에 가기 어렵지만, 가까이 가려는 노력 자체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철이 든다는 것, 철이 들어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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