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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부 30화

질투 유발자

by 채수아

우리 집에 오시는 정수기 코디님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커피 한 잔을 대접하다가, 서로 작은 선물을 나누다가, 지난해부터는 마음속의 이야기까지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 많은 이야기 중에 가슴속에 콕 박힌 이야기는 바로 '동서지간의 질투'였다. 성품이 좋은 그 코디님은 한 집안의 맏며느리였고, 서울에 사시는 시어머님 근처에 동서네가 살고 있었다. 그 동서는 중소기업의 회장 딸이었고, SKY를 졸업했으며, 지금은 대기업의 중간 간부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동서가 시집올 때 자기와의 격차가 있어서 불편한 마음이 꽤 컸는데, 시댁 식구들에게 잘하는 모습에 불편한 마음이 조금씩 사라졌다고 했다. 그런데 늘 한결같은 친절과 베푸는 모습에 고마운 마음보다는 자꾸 질투가 생겨서 동서를 볼 때마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미운 마음이 자꾸 들더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스스로를 달래 보아도 그 못난 질투심이 사라지지 않아 오랫동안 괴로웠다고 내게 고백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꼬여있는 자기 모습을 깊이 반성하고, 동서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 마음이 이어져서 참 다행이라고 했다. 난 코디님의 말씀을 들으며 계속 우리 형님이 떠올랐다.


​상처 깊은 시댁의 큰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따로 살면서도 무서운 시어머님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커, 결혼을 앞둔 시동생에게 시어머님을 모셔달라고 부탁했던 형님! 어머님도 시누님도 다 알고 있던 그 충격! 평생을 단칸방에서 삼 남매를 피눈물로 키우셨던 어머님은, 3층 집을 지어 두 아들 가족과 함께 사는 게 꿈이었던 분이셨다.


큰며느리의 그 말에, 내 남편은 어머님을 평생 모시고 살겠다는 결심을 했고, 어머님이나 시누님은 착한 막내아들이 어머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너무나 안성맞춤으로 수녀의 삶을 꿈꾸던 나는, 결혼생활을 수도 생활 비슷하게 받아들였고, 이 상처 깊은 시댁에서 따스한 온기가 되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모시기 힘든 성격의 시어머님을 모시며 맏며느리 흉내로 사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매일 몸과 가슴으로 느끼며 내 결혼 생활은 이어졌다.


"동서! 나는 어머니가 너무 무서워. 어머니 앞에 서 있으면 벌레가 된 기분이야. 동서는 나와 다른 사람인 것 같아. 그릇이 큰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겠지. 난 동서를 존경하고 살아."


​형님께 그 말을 듣고 나는 형님이 가여운 마음마저 들었다.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고, 상황을 피해 가고 싶은 그 마음이 스스로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의 언니처럼 잘해드리며 30년 동안 동서지간으로 잘 지내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말기 암 진단을 받으신 후 스텐트 시술을 받으러 입원을 하신 날의 일이었다. 난 남편과 부리나케 병원으로 향했고, 어머님을 위로해 드린 후에 간병인 아주버님이 사 오라는 물건을 사기 위해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화장실로 달려갔다. 수돗물이 콸콸 쏟아지듯이 물이 쏟아졌다. 무서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맥이 딱 풀리며, 반시체의 모습으로 늘어졌다.


남편은 나를 데리고 1층 외래 진료실 앞에 앉히고, 빨리 좀 해달라고 간호사들께 부탁을 했다. 나는 남편의 팔을 잡고 거의 누워있듯이 앉아 있었다. 물건을 사러 나간 후 한참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형님 부부는 우리를 찾아 1층까지 내려오셨다. 아주버님은 간호사에게 다가가시더니, 우리 제수씨가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으니, 남은 침대라도 하나 빌려달라고 다급하게 부탁을 했고, 간호사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어머님 시술이 곧 있을 시간이어서 두 분은 어머님께 올라갔고, 나는 의사 선생님 진료 후 응급실에서 링거주사를 맞으며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후, 정신을 차리고 남편과 함께 어머님께 올라가니, 시술 후 어머님은 나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계셨다. 그렇게 몸이 약해서, 자주 아파서 어떻게 하냐며 내 손을 잡아주셨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시누님께서 내게 가끔 전화를 하셨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녀 사이였기에, 회한이 꽤 크신 것 같았다. 통화 중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님 스텐트 시술하신 그 밤에, 아주버님 부부가 큰 부부 싸움을 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유가 아주버님께서 나를 위해 침대를 구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그 행동이 형님을 자극하며 몹시 심한 부부 싸움으로 이어져서, 그 상황을 이해 못 하겠다며 자기 여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하셨다고 한다. 난 그 순간, 형님이 나를 만나면 수십 번을 하셨던 그 말씀이 떠올랐다


"내 남편은 이 세상에서 동서라면 꾸뻑 죽어. 이 세상에서 동서에게 제일 잘하고 산다니까."


​약간의 미소를 띠며 하시던 그 말씀에 나는 이상한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시댁의 맏이로서 동생들을 건사했던 아주버님을 나는 시아버님처럼 생각했고, 아주버님 또한 나를 며느리로 생각하신다고 받아들였다. 또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미안함에 나에게 더 극진하신 거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시누님 말씀에 너무나 깜짝 놀랐다. 형님의 그 마음은 실행에 옮겨졌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삼우제를 마친 날, 앞으로 각자 따로 살자고 시댁 식구들 앞에서 당당히 선포하신 형님! 그 이후 우리는 만난 적이 없다.


코디님의 동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해불가의 형님 모습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 긴 30년 동안, 나로 인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까,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고, 형님을 만나지는 않고 있지만 평화롭게 잘 사시기를 빌뿐이다.


나는 긴 세월, 형님의 질투 유발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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