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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6] 그린델발트의 밤과 와인 한 잔




“네 인생의 중요한 기점인 순간에 함께 해주고 싶었어. 네가 당장 결혼식을 올릴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나 모두가 퇴사하라고 하는 회사에서 버텨내고 무언갈 이뤘으니,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축하하고 너의 터닝포인트를 응원하고 싶었달까“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보영이가 스위스에 오기로 결심했던 때의 이야기를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며 생각하게 되는 고민들을 알아주고 또 그 깊이를 이해해주는 고마운 친구.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한 발 먼저 나아가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을 알아채고 내게 길을 알려주는 사람.


사실 보영이가 스위스에 오겠다는 말을 듣고 너무 좋았음에도 티를 내기가 어려웠다. 같은 유럽 대륙이라 해도 스위스가 무슨 옆집도 아니고, 돈 들이고 시간 들이고 촉박한 일정에도 타이트하게 궁리해 나를 만나러 와준다기에 너무 기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나열한 그 모든 것들을 뚫고 오겠다고 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더 오래 살면서,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에는 커다란 희생과 노력이 있다는 걸 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위해 건너 온 시간과 노력들에 고마움 보다 큰 미안함이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친구건 연인이건 당연한 일은 없으니까.




그래서 저 말들이 너무 고마웠다. 30대 후반이 되고, 보통은 결혼식을 기점으로 다들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축하하며 서로의 길로 나아가지만, 그럴 일이 없는 내게는 어쩌면 지금의 이 한달 간의 시간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쉬고 싶은‘ 마음을 이루는 기회 정도로 가볍게만 생각했을 뿐.




그러나 나는 안다. 그것이 진짜 가벼운 날들이 아니라, 그녀의 말처럼 능선에 올라 삶을 돌아보고 앞에 놓인 갈림길 사이에서 잠시 쉬어가며 고민하는 시간들임을. 그리고 이 시간이 내게 남길 무언가가, 내 앞에 놓인 생에 적잖은 영향을 주리란 것도.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내가 외면하고 싶은 순간들도, 잊고 싶은 순간들도, 모두 다 함께 소화해주며 나아가는 소중한 친구.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시고 헤어지는 길, 어쩐지 나는 잠시 잊었던 저 하늘 너머에 두고 온, 나의 자리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시간 동안 단지 그 자리를 잊어버리려 노력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나다운 자리를 찾아 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겠다. 잊기 보다 마주보기, 늘 미뤄두기 보다 할 수 있는 만큼씩만 고민하기.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친구의 곁에서, 나도 꼭 그녀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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