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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7] 우리 조금만 덜어내며 살자


[불안에 관하여]


보영이와 기차에서 두런두런 수다를 떨다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보영이가 지켜본 결과 나 역시 불안을 느끼면 과잉 행동을 통해 불안을 해소하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보영이의 말이 맞다고 느낀다. 내가 부산스럽게 굴고 요란하게 뭔가 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다면, 필시 그것은 큰 불안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불안이 동인이 되어 좋은 결과가 나타나면, 불안은 더 큰 꼬리를 내어주는 악순환은 덤.



보영이는 내게 삶에 대해 좀 더 여유로운 태도를 가져도 좋다고 말했다. 이만큼 살아보니 어차피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아지고, 결국 나 자신에 대해서, 이 상황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다면 길게 고민하고 부산스럽게 모든 상황을 가정해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마음은 스스로를 믿고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이 선택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면, 어차피 선택하지 않을 많은 후보들을 인생에서 제거해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 상황에서 내가 가장 행복해질 선택은 무엇인지, 머리로 모두 계산해 보지 않아도 스스로 답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그리하여 이렇게 작은 소리 하나에도 큰 울림을 더하기 마련이다.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딱 한 발짝 떨어져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준 시간들. 그 시간의 깊이와 힘을 믿기에, 오늘도 나는 나를 돌아본다.


조금 덜 고민하고, 조금 더 나를,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을 믿어보자.





[아픈 날]


스위스에 오기 전부터 무리한 탓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오는 내내 이렇게 빌었었다. 보영이가 왔다 가는 때까지만이라도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빌기만 하면 치성이 부족해 아플까봐 공항에서 함께 먹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영양제는 모조리 쓸어와서 지난 5일 간 매일 먹었다. 그래도 효과가 있었던지 보영이와 함께 놀려다니는 동안은 아프지 않았는데, 딱 약빨이 떨어지는 오늘, 보영이가 떠나는 날이 되자 감기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생의 타이밍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치성이라도 들어주신 모든 신들께 감사의 인사라도 드려야 할지.



여튼 영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보영이와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코인라커와 한참을 씨름한 끝에 겨우 인터라켄 시내를 조금 돌아다닐 수 있었다. 약기운 때문인지 사실 눈앞에 보이는 설산도, 푸른 강물도 몽롱하게 느껴질 뿐 생경한 감각으로 나를 깨워주지 못했다. 그래도 보영이가 맛있는(그리고 비싼 ㅠㅠ) 한식을 사준 덕분에 땀 흘리며 김치찌개를 먹고 조금은 나아졌다.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 하고 보영이와 이별하는 길, 조금 좋아진 컨디션을 믿고 다른 곳을 여행해볼까 고민하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숙소로 향했다. 호텔에 돌아와 한참을 수다스럽게 웃고 떠들던 친구가 없어진 빈자리를 조금 실감했다. 그리고 더 깊이 감정에 빠지지 않게 감기약을 먹고 잠을 청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났을까? 시간은 저녁 6시. 오늘 하루를 이렇게 보내도 괜찮을까 하는 죄책감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시 생각을 바꿔본다. 무엇을 위해 나는 이곳에 왔을까? 내 삶의 속도를 찾고 싶었고, 내 삶의 방향을 묻고 싶었고, 동시에 지금 하는 이 자그마한 생의 고민들이 손톱 밑에 걸린 가시일 뿐임을, 장엄한 자연 앞에서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나 삶의 관성은 무섭도록 힘이 세서, 또다시 나를 이렇게 죄책감의 늪에 몰아넣고야 만다. 무엇을 하며 발버둥치고 불안을 이겨내려는 삶.




이 곳에서의 시간이 이제 지난 날의 나를 놓아주듯 자연스레 불안의 쳇바퀴와 멀어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쓸데없는 걱정은 거기까지 하고, 진짜 나를 위해 맛있는 밥을 먹고 다시 잠에 들기로 했다. 덕분에 훨씬 나아진 오늘. 다시 길 위에서 나대로 잘 해 낼 수 있을거란 묘한 자신감이 생긴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이 마음 이대로 살아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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