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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모 Jun 17. 2020

빨간 집, 빨간 압생트

 

 케레타로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일명 ‘빨간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소심했던 내가 지구 반대편 나라에 가서 기약 없이 살다 오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에서부터, 반쯤 미친 빨간  아이들과 가까워진 것은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빨간 집에는 루이, 이반, 디에고가 살았다. 루이는 기다랗고 곱실거리는 푸른색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밴드의 베이시스트다. 히드로밀이라는 술을 직접 제조해서 판매할 만큼 음주를 좋아하는 친구다. 이반이는 루이와 같은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구석구석에 메탈리카 문신을 잔뜩 새겨놓았다.  왁스를 바른 것처럼 빳빳하게 세워진 이반이의 갈색 머리와 온통 검은색뿐이던 옷이 기억난다. 디에고는 처음 만났을  열여섯 살이었는데, 미식축구로 다져진 커다란 체격과 종일 피워대는 줄담배 때문에  본래 나이를 잊곤 했다. 모두들 장난기가 가득하면서도 외롭던 타지 생활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자 말동무였다.


  친구들은 동네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집에서 늘 시끄러운 헤비메탈 노래를 틀어놓았다. 밤이 되면 항상 거실에 붉은색 조명을 켜놓았기 때문에 나는 그 집을 ‘빨간 집’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과 뮤직비디오를 보고, 친구들을 잔뜩 불러 모아 파티를 열기도 했다. 매주 월요일엔 밴드 멤버들이 모여 합주 연습을 했다. 언제나 맥주를, 가끔씩 데낄라를 마셨고 어느 날은 꼭 빨간 집 조명처럼 새빨간 압생트를 마셨다.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예술에 대한 갈망과 함께 마신 술, 피카소와 고갱 등 수많은 화가가 즐겨마셨다는 술이 바로 압생트다. 이 압생트가 고흐를 환각상태에 빠지게 하고 천재적인 화풍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이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주와 맥주를 즐겨마시던 내게 비교적 친숙한 술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환각의 원인이 되는 주원료를 사용한 정통 압생트의 유통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압생트는 어딘가 수상하고 기이한 느낌을 주는 술이었다.


 여느 때처럼 마실 술을 사러 간 날, 루이는 흔하게 진열되어있는 미색 술들 가운데 빨간색 압생트를 골라 들었다. 내가 알고 있던 압생트는 초록색이었는데 그 압생트는 형광빛이 감도는 빨간색이었다. 원래도 기묘함을 주던 술이 배로 의심스러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병 앞에는 삼지창을 든 검은색의 악마가 그려져 있었다.

 루이는 압생트를 마시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숟가락과 설탕, 라이터를 가져왔다. 그리고 숟가락 위에 압생트를 조금 따르고 설탕을 뿌렸다. 하얀 설탕은 말간 액체와 만나 금세 투명하게 젖어내려 갔다. 이 설탕을 완벽하게 녹이기 위해 라이터로 몇 번이고 불을 붙여 숟가락을 달궜다. 불을 만난 압생트 위로 시퍼런 불이 몽글거리듯 춤췄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는 압생트도, 둘러앉은 우리의 얼굴도 온통 그저 빨간색이었지만 불빛만이 파랗게 빛나는 게 마법처럼 신기했다. 다 녹은 설탕은 잔에 따른 압생트와 섞어 마신다. 압생트의 맛은 독하고 알싸했다. ‘병원’을 생각나게 하는 강한 소독 향, 알코올 향이 느껴졌다. 물약과도 같은 끈끈한 액체가 매끄럽게 목을 타고 들어가 속을 달궜다. 불의 잔상이 떠오르며 뱃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 하나 짐짓 괜찮은 표정을 짓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나의 첫 압생트는 생각만큼 수상하고 생각보다 지독한 맛의 술이었다.    

그날 우리는 따라놓은 술 한잔을 겨우 해치우고는 다시는 압생트를 마시지 않았다. 반도 채 먹지 못한 술 병을 선반 한구석에 방치해놓고 대신 값싼 데낄라를 마셨다. 압생트는 긴 시간 동안 내게 ‘예술가들의 애주’라는 이유로, 또 쉽게 구해 마실수 없다는 이유로 가장 신비롭고 낭만적인 술이었다. 비록 그 맛은 그다지 특별하다거나 아름답진 않았지만 빨간 집 친구들과 함께 했던 추억과 맞물려 이따금 불처럼 뜨거운 그 맛이 생각나곤 한다. 내가 마셨던 압생트에 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들어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과의 시간은 환각과도 같게 아직까지 몽환적이고 꿈처럼 느껴진다. 빨간 등불 아래에서 보냈던 소란스러운 밤들, 빨간 집 친구들이 키우던 루시퍼란 이름을 가진 고양이, 주술처럼 들리는 낯선 멕시코의 슬랭. 나는 어쩌면 압생트의 세계에 갔다 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압생트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밑의 블로그 링크를 통해 읽을 수 있다.

http://lanugo.egloos.com/2267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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