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 -김영하
2014년, 최신형 휴대폰 갤럭시S6가 나온 지 1달도 채 안되었을 때, 갤럭시S6를 일시불로 긁었다. ‘여행 갈 때 카메라는 필수품 아니겠어?’라며 구매가 마땅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빨주노초 꽃 자수가 새겨진 커버까지 야무지게 씌워주니 준비완료다. 휴대폰을 구입하고 2주 후, 첫 이탈리아 6박 8일 여행을 홀로 떠났다.
포로 로마노 전경, 2015
로마 떼르미니역 근처 한인민박에서 3일동안 묵었다. 셀카봉을 들고 진실의 입, 콜로세움, 판테온 신전, 바티칸 등 로마 시내 구석구석을 걸으며 신상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홀로 떠난 딸을 걱정하시는 엄마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조심 또 조심!’ 이라는 걱정이 잔뜩 섞인 카톡을 보냈다.
진실의 입, 2015
그 때 마다 생사확인용 사진 10장 정도와 안전을 다짐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넷째날, 로마를 떠나 베네치아행 야간 열차를 탔다. 한국인 가이드가 진행하는 베네치아 당일 투어를 신청했다.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과 어울려 다닐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떴다. 베네치아행 야간 열차는 성별을 나누어 배치되는데 한 칸에는 2층 침대가 양쪽에 있었고 나는 2층을 사용했다. 같은 칸을 쓰게 된 외국인 여자가 나에게 혼자 왔느냐는 둥, 어디서 왔냐는 둥, 몇 일 동안 이탈리아 여행을 하냐는 둥 물었다. 혼자 여행 왔다는 그 여자는 브라질에서 왔다고 자기 소개를 했는데 겉보기에는 전혀 브라질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다. 낯선 사람과 한 공간안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영 찝찝했지만 오랜 대화 끝에 경계 태세가 풀린 나는 피곤한 몸을 뉘여 깊은 잠에 빠졌다. 짐은 발 밑에, 휴대폰은 내 머리맡에 두고.
새벽 6시경 왠지 모를 이상한 기운에 눈이 떠졌고 머리맡에 둔 휴대폰이 사라진 걸 발견했다. 1층 침대에서 자던 브라질 여자도 사라졌다. 다행히 짐들은 그대로 있었다. 당황한 나는 손짓 발짓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역무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온 브라질 여자가 범인이라는 심증이 100% 들었지만 그녀는 짐을 다 열어 보여주며 결백을 호소했다. 혈혈단신 타지로 떠나 온 여행자 신분인 나로서는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찝찝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열차에서 내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 2015
베네치아역에 도착해서 내리는데, 헉! 브라질에서 혼자 여행 왔다던 그 여자가 외국인 남자 2명과 같이 배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그들이 3인조 강도로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최소 300장 이상의 동영상과 사진을 간직한 최신형 휴대폰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허무한 작별을 했다. 베네치아역에 내려 만난 한국인에게 휴대폰을 빌려 엄마에게 연락했다. 해외여행자 보험에 가입했기에 경찰서에 가서 보험회사에 제출할 진술서를 썼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모양이었다. 진술서를 쓰는 내내 지루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베네치아 경찰관의 시선을 잊지 못한다.
아이유가 뮤직비디오 촬영한 무라노섬
베네치아에서부터 여행 기록을 그만 두었을까? 유비무환의 마음으로 전에 쓰던 구형 핸드폰과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갔기에 남은 일정 중 다행히 여행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휴대폰과 함께 사라져 버린 기록은 여행기억과 함께 사라졌고 해외여행가서 처음 물건을 잃어버린 이 사건으로 여행기록의 가치를 절실히 깨달은 인생교훈을 얻었다. 그나마도 엄마에게 매일 사진을 보내주어 여행 기록을 조금이나마 건져 다행이라며 쓰린 맛을 삼켜야 했다.
유리공예의 도시 무라노 섬
요즘 사진이 워낙 고화질이라 용량이 크다. 사진을 휴대폰에만 저장해두면 휴대폰을 분실하거나 고장이 났을 때는 손 쓸 방법이 없다. 구글 포토, 드롭박스나 네이버 Mybox 같은 클라우드 시스템을 적극 활용해 주기적으로 백업 하고 무엇보다 기록을 담은 카메라나 일기장을 잘 관리해야 한다.
기록 그 자체만큼 기록물의 관리가 중요하다. 같은 값인 두 가지 물건을 분실 했을 때 느끼는 황망함의 무게는 기록을 담은 물건이 그렇지 않은 물건보다 무겁다. 기록을 담은 물건은 시간이 갈수록 감가상각 되는 같은 가격의 물건 보다 가치롭다. 초등학교 때 숙제로 만든 가족신문을 이사 다니며 버려서 아깝다. 가족들이 모여 가족신문을 그리고 쓰던 그 시간은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내용은 기억나지 않으니 아쉽다. 그러니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내 손으로 나온 기록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안전하게 보관하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