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어느 날, 퇴근 후 서교동에서 열린 <아임디깅 전>에 다녀왔다. 한 권의 노트에 한 권의 주제로 깊게 쓴 노트들을 전시한 그 곳은 기록덕후들의 성지였다. 노트의 주제는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된 외국인 디자이너에게 이메일을 보내 작품을 진행하는 예술가의 노트, 한 회사에 다니며 사원부터 팀장까지 명함을 모은 업무기록 노트, 포근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뜨개질 노트까지 다양했는데, 세상은 넓고 기록할 것은 많다.
관심을 관점으로, #쓰는사람
단순하게 큰 기록과 작은 기록으로 나눠본다. 큰 기록이라면 점심에 찾아간 본 동네 맛집, 어제 본 반전 가득한 드라마 장면, 울분을 느끼며 본 뉴스 같은 굵직한 내용이다. 큰 기록을 한 권의 노트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3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OO일기’로 이름을 부여해 기록의 역할을 분류한다. 단, 그 순간 의욕에 불타 드라마 일기, 뉴스 일기, 맛집 일기 들로 마구 세분화 해 버리면 쉽게 피로해지므로, 좋아하는 몇 가지 주제를 선택해 노트의 역할을 정하는 것이 좋다.
둘째, 분류가 가능한 바인더를 활용한다. 일단 기록한다. 20공 바인더, 6공 바인더가 유행인데 나는 20공 바인더를 추천한다. 언제든지 분류할 수 있는 바인더로 인덱스를 붙여 공간을 구분한다. A5 사이즈 클립보드에 야무지게 끼워서 쓰면 휴대하고 다니기에 좋다.
셋째, 단 한 권의 노트에 쓰고 싶다면 내용별로 인덱스를 만든다. 글마다 말머리를 달아서 기호나 형광펜으로 인덱스를 만들어 구분한다. 예를 들어, 확언을 쓴 데에는 '[확언]' 이라는 말머리를 달고 글을 시작하며 말머리 부분을 노란색 형광펜으로 칠한다. 맛집을 적을 때는 '[맛집이름]'을 말머리로 달고 핑크색 형광펜을 칠한다. 형광펜이 너무 많이 필요할거라는 걱정이 든다면 기호로 구분해도 좋다. 이 방법이라면 불렛, 즉 기호와 함께 쓰는 일기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 <불렛저널>이 많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작은 기록은 오후 4시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국 안에 들어 있는 하트 모양 파 처럼 찰나의 보고 느낀 것들이다. 작은 기록은 아무리 쌓아도 조각 조각 잘라진 색종이처럼 흩어진다. 이것들은 주로 메모 어플에 보관한다. 조각난 색종이도 검색 가능하다면 언젠가 살을 붙여 큰 기록으로 뻗어갈 수 있는 영감이 된다.
짬뽕 한 그릇을 건더기와 국물까지 야무지게 다 먹으면 뿌듯하다. 몰스킨 노트의 마지막 한 페이지를 꼬박 다 쓰며 이와 비슷한 뿌듯함을 느꼈다. 노트 마지막 페이지에 방점을 찍은 그 순간, 기록력은 상승했고 기록 레벨 +1이 올라갔다. 비로소 기록계 하수에서 중수로 진화했다. 노트 한 권을 다 써보니 문구점에서의 고민은 시간낭비이며 기록의 시작만 늦출 뿐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한 권을 다 쓰는 뿌듯함을 알기에 쟁이면서도 더 이상 걱정 없이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 노트를 고르는 기준이라 쓰고 노트의 증식을 합리화하는 건 아닐까 라는 의심은 그만 곱게 접어 하늘 위로 날려보내자.
스스로 분신술을 자처하며 기록욕에 빠지면 금방 지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뱉어낸 중언부언은 허공으로 사라지지만 구상 없이 기록한 노트는 곧 종이 낭비가 되고 블로그 에는 이름 없는 카테고리만 늘어간다. 목적과 방향성 없이 기록을 하다 보면 수직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지 않고 수평으로 여기저기 널브러진다.
에너지의 안정도를 이야기 할 때 과학에서는 ‘엔트로피’라는 단어가 쓰인다. 엔트로피는 숫자로 표현되는데 그 값이 감소할 때 에너지가 안정된다. 이름 없는 노트들이 쌓여갈 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에너지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결국 쉽게 피로를 느끼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때로 과한 기록욕은 턱 끝까지 숨이 찰 만큼 짐이 된다. 어깨 위로 곰 한 마리 올라간 듯 쌓인 피로로 침대에 벌러덩 뻗고 싶은 날에는 호흡을 가지런히 하고 숙면하는 것이 차라리 보약이다. 새 힘을 충전해 정돈된 기록을 다시 시작해 보는 거다. 마라톤 하듯 천천히 자신만의 기록을 이어나갈 때 OO노트 Vol.1 을 완성하는 그 날을 분명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