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피부에 깜찍 미소를 장착한 하나뿐인 조카 하린이 사진과 영상을 보면 하루 피로가 풀린다. 우하하하 얼굴을 뒤로 젖히며 신나게 박장대소 하면 재밌어라 하니 혼신의 힘을 다해 웃겨주는 ‘조카바보 고모’가 바로 나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태어난 우리 조카 하린이의 첫 생일에서 돌잔치의 꽃인 돌잡이 순서가 왔다. 판사봉을 잡으면 로스쿨에 합격한 마냥 기뻐하고, 마이크를 잡으면 세계적인 스타가 될 상상을 하며 신난다. 하린이는 돌잡이가 클라이막스임을 알았는지 뜸을 들이다가 결국 청진기를 집어 들었고 ‘경축! 의대 합격!’ 이라며 즐거워 했다.
카카오프로젝트100에서 매일 1일 1질문을 받고 답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했는데 어느 날 질문은 ‘돌잡이 물건’ 이었다. 30여년 전으로 필름을 되감기 해서 나의 돌잔치로 가본다. 오빠 돌잔치 사진은 있는데 둘째인 나는 사진이 없으니 돌잡이에서 뭘 잡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엄마찬스를 썼다.
‘딸 돌잡이 뭐야?’
‘연필’
비비 꼬인 나는 의심부터 하며 ‘인증샷이 없잖아.’라고 메세지를 남긴다. 돌잡이에서 연필을 잡은 채 방긋 웃는 어린 나를 상상해 보지만 선명히 그려지지 않으니 아쉬울 뿐이다. 사진이 있어야 돌잡이에서 정말로 연필을 잡았는지 안다. 그저 엄마가 들려주는 말을 믿고 ‘돌잡이가 연필이었다면 꽤 마음에 드네.’ 하고 넘길 뿐이다.
일생에 인증샷을 남기지 않아 아쉬운 또 하루의 멋진 날은 K 언니와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 놀러 갔을 때다. 한국에서는 부끄럽지만 한국사람 눈을 피해서는 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기로 했다. 그건 바로 비키니를 입고 해변을 즐겨보는 것이었다. 무슨 용기에서 였는지 썬드레스를 훌렁 벗어 제끼고는 비키니 차림으로 파워 당당하게 센토사 해변을 거닐었다. 그러던 중, 중국말을 하는 남자가 우리를 몰래 휴대폰으로 찍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 아빠 나이대로 되어 보이는 그 남자에게 씩씩거리며 다가가서 짧은 영어로 사진 당장 지우라며 한껏 열을 뿜었다.
“Your age may be same as my father’s age!!(?) (우리 아빠랑 당신이랑 동갑이야!)”
안전 요원에게 도움을 요청해 상황을 마무리 했다. 설마 그 아저씨, 비키니 사진을 아직까지 자동 백업해서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라고 의심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충격 때문이었을까. 타지에서 소동을 벌인 센토사 섬에서의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머릿속에 남은 거라곤 중국인 아저씨와 안전요원과 입씨름하는 장면뿐. 숙소에 돌아와 K 언니와 센토사섬에서 비키니까지 입었는데 사진 한 장 멋드러지게 찍지 못해 아쉽다고 그 날을 잊지 못할 거라며 수다를 떨었다.
2012년부터 내 블로그에 올린 여행 포스팅은 벌써 176개다. 여행에서 인증샷을 찍고 기록하는 나만의 방법은 2가지다.
첫째, 사진마다 꼬리 설명을 달아 기록한다.
근사한 미슐랭 맛집을 가서 사진을 찍고 짧은 한 줄 평을 남긴다. 예를 들어 스페인 마드리드에 출장 갔을 때 방문한 레스토랑 'BOTIN'을 남긴 포스팅에는 이런 설명이 달려있다.
BOTIN, Madrid, Spain, 2016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라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이 식당.’
‘해리포터나... 어떤 영화에서 나올 법한 분위기 있는 이곳. 정말 영화 같았다.’
‘새우와 마늘의 조합은 어떻게 조리하든 옳다.’
시간이 흘러 맛의 기억은 희미해져도 구체적인 사실은 남는다. 사진을 남겨도 귀찮다는 핑계로 하루 이틀 미루다 보면 세세하게 적을 수 있었던 기억들이 흩어지고 다시 담으려면 이미 늦은 후다. 심할 경우 장소 이름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둘째, 사진 찍은 날짜와 시간이 도장처럼 사진에 찍히는 ‘타임리포토’나 ‘타임스탬프’ 어플을 활용한다. 경찰 수사의 단서가 되는 것도 아니요. 원본 사진에 글자가 남아 지저분한데도 시간이 찍힌 사진이 좋다. 순간을 남기고 싶은 집착 일까. 스탬프가 찍히는 어플을 이용하면 사진만 보고 정확한 일시를 알 수 있어 좋다.
30여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 사진도 남기고 그 날 내 표정은 어땠는지 울지는 않았는지, 돌잡이 때는 무얼 잡았는지, 이것 잡을까 저것 잡을까 고민하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뭘 잡기를 바랐는지 등 풍경을 남겨주면 좋겠다.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그 사실을 적어줬으면* 말이다.
고모가 되어보니 우리 고모들이 어렸을 때 나를 얼마나 예뻐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감사하다. 하지만 나의 돌잔치 사진이 없듯 고모들과 찍은 어렸을 적 사진이 없다. 돌아오는 가족모임 때는 하린이와 우하하하 얼굴을 뒤로 젖히며 사진 한 장 남겨야겠다. 조카 바보 고모가 준 사랑을 후일에 하린이가 알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