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가 돼라. 아티스트란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용기와 통찰력, 창조성과 결단력을 갖춘 사람이다. 아트는 결과물이 아니라 여정이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혼신을 바칠 그 여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스 고딘, 이카루스 이야기
월요병을 앓고 숨차게 달리다 보면 불금을 하루 앞둔 목요일을 지나 주말을 향해 파워퇴근 하는 직장인이다. 집에 와서 식탁에 태블릿PC를 올려놓고 유튜브를 보며 저녁을 먹는다. 유튜버들은 어찌나 창의적인지 봐도 봐도 볼 것들이 쏟아진다. 언젠가 봤던 영상인가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도통 기억나질 않으니 본적 없는 영상인가 하고 그냥 본다. 책을 볼 때도 마찬가지. 어디선가 읽어본 듯 싶어 도서관 대출현황을 찾아보면 역시나 몇 달 전 대출해서 본 책이다. 심한 경우 우리집 책장에 꽂혀 있기도 하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영상을 보고 책을 읽으며 소비한 시간이 무색하게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록해 두지 않아서 그렇구나.'
읽은 책, 유튜브 영상 그리고 즐겨보던 마블 시리즈 영화까지 소비한 콘텐츠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시 보고 싶을 만큼 좋은 영상은 유튜브 재생 목록을 만들어 한 곳에 담았고 영상을 통해 영감을 얻은 내용은 메모 어플에 남겼다. 때로는 스마트폰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으로 영화 속 대사, 유튜브 강연의 뼈때리는 말 그리고 마음을 저격하는 책 속 한 문장을 간직하고 싶었다. 남길 공간으로 A4용지를 반 잘라 끼워서 쓰는 20공 바인더를 택했다. 이 종이에 썼다가 저 종이에 써도 한 곳으로 모으고 분류할 수 있어 편리한 문구였다. 콘텐츠를 소비만 하던 내가 소비한 콘텐츠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내 손으로 만든 콘텐츠가 아닌 외부로부터 얻은 콘텐츠의 수집이었다. 콘텐츠를 소비하고 수집하다 보니 나도 무언가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프로처럼 잘 하지는 못해도 아웃풋을 만들고 싶은 열망이 피어났다. '나라고 못할쏘냐!' 하는 생각이 에워쌌다.
시간은 남고 할 일은 없어 그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하던 사회초년생 시절,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자 우쿨렐레를 배웠다. 출근할 때 우쿨렐레 케이스를 어깨에 매고 퇴근 후 동호회 모임에 갔다. 회사 밖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괜히 어색했고 모임에 정을 붙이지 못하면서 점점 모임에 가기가 꺼려졌다. 그러던 와중 어떤 블로그에서 블로거 본인이 직접 우쿨렐레를 치며 노래하는 영상을 보았다.
'나도 연주 영상 만들어서 블로그에 한번 올려 볼까.'
베짱이마냥 우쿨렐레를 딩가딩가 치며 20대 여린 감성의 보이스로 노래를 불러 재끼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블로그에 올렸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내가 직접 찍어 공유한 첫 영상이었다. 그 블로그가 아니었다면 20대의 우쿨렐레 연주 영상이 남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문득 감사하다. 우쿨렐레에 흥미가 떨어질 때쯤 나는 피아노를 다시 쳐보기로 마음먹었다.
흥 많았던 유년시절, 악기 다루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파트 상가에 있는 피아노 학원 원장님과 1:1로 상담을 하고는 피아노 학원을 등록 하고 왔다며 엄마한테 피아노 학원 원비봉투를 내밀었단다. 진심이 통했는지 엄마가 피아노 학원 등록을 허락해 줬다. 체르니 30에 입문할 때까지 다니다가 그만두고 교회에서 어깨너머로 피아노를 배웠다. 천부적인 재능이나 피아노로 밥 벌어 먹고 살아야겠다는 열정은 없었기에 피아니스트의 꿈은 진작 넣어뒀다. 그치만 다른 건 몰라도 취업 후 독립하여 자취방에 가장 먼저 들인 가전제품이 디지털피아노 였을 만큼 피아노 치는 시간이 즐거웠고 피아노 치는 내 모습이 좋았다. 디지털피아노를 사고 보니 의자가 없어서 식탁 의자를 끌어다 앉아 헤드폰을 끼고 밤늦도록 피아노를 쳤다.
한번은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를 연주한 영상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영상을 보고 카시오 공식 블로그에서 연락이 왔다. 광화문연가 영상을 퍼가는 것을 동의해 주면 피아노 관련 액세서리를 주겠다는 제의였다. 옳다커니 하고 피아노 의자를 받았다. 예술을 담은 기록을 통해 얻은 작지만 소중한 물질적인 첫 성과였다.
피아노 연주를 영상으로 남기고서 두 가지 선물을 받았다. 하나는 연주 영상을 틀리지 않고 찍기 위해 연습하고 직접 녹화하며 보낸 그 시간에는 즐거움이었고, 또 하나는 10년이 지난 지금 느끼는 뿌듯함이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처럼 비범한 실력은 아니지만 만약 그 영상을 만들어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더라면 피아노 구입처로부터 의자를 선물 받는 재미난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태어나 처음 취미를 기록하고 외부로부터 인정받은 경험의 시작이었고 차츰 서툰 기록이 가져다 주는 재미와 소중함을 알아갔다. 내가 처음 어떤 블로그를 보고 연주 영상을 남기기로 다짐했던 날처럼, 내가 만든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 영상이 누군가 에게도 용기를 주었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인 오늘, 한강에서 나무와 꽃 보며 우쿨렐레 치기 좋은 봄이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