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꿈꿔봐도 될까요?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난생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났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 관광과 더불어 텍사스 달라스에 사시는 아버지 친구분 댁에서도 며칠 머무는 꽤 긴 일정이었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딱히 미국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터라 큰 기대 없이 비행기에 올랐지만, 막상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소는 스탠퍼드 대학교. 그림처럼 아름다운 캠퍼스와 자유로운 분위기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꿈같은 장면 속에서 질끈 묶은 머리와 셔츠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누비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어쩌면 그 순간이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달라스에서의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색달랐다.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계 강국으로 모두가 우러러보는 이 나라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미국인들의 생활과 일상을 깊이 알고 싶었다. 특히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궁금증이 컸던 나를 위해 아버지의 친구분이 같은 한인교회에 다니는 한국인 남학생을 소개해주셨다. 첫 만남에서 그 학생은 한국 이름 대신 영어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미국 학교에 입학하면서 나이를 낮추었다는 사실과 함께, 본인의 할아버지가 서울 소재 대학의 총장으로 계시다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그 학생의 도움으로 탐방했던 미국 고등학교는 꽤 인상적이었다. 자유로운 복장의 학생들이 드넓은 잔디에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고 하나같이 얼굴에선 미소와 생기가 넘쳐흘렀다. 복도에서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고 이따금 골프가방을 멘 무리들이 지나갔다.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마치 대학생처럼 자유롭게 수강과목을 선택할 수 있고 창작문예, 양궁, 현대미술 등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예술활동이 다양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 중 단연 나를 매료시킨 단어는 '창작문예'였다. 덧붙여 그는 미국과 한국의 교육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면서, 예로 한국에서 문학 작품을 가르칠 때 단어의 의미, 작가의 의도 등을 달달 암기해야 하는 것과는 다르게 미국은 철저히 토론식 교육으로 정해진 답이 없는 문학 수업을 한다고 알려주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학교 투어를 하는 내내 나도 모르게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떠올랐다. 새벽 두 시, 집으로 가는 학원 버스 창문에 기대어 아무 표정 없이 차창 밖을 응시했던 날들도 머릿속을 스쳐갔다. 일곱 살이었다. 처음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던 때가.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키워준 건 어쩌면 학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집보다 학원이 더 익숙해지면서, 동네 학원에서 종합 학원, 종합 학원에서 입시 학원으로, 나를 담는 틀도 함께 커갔다. 유난히 책을 좋아했던 문학소녀는 어느새 시험 성적 하나에 모든 것이 휘청거리는 나이가 되었고, 책을 읽을 때마다 그만 놀고 공부하라는 불호령에 굴복하는 나이가 되었다.
돌아보면 마냥 괴롭기만 했던 시절은 아니었다. 시험 기간 독서실에서 함께 밤을 새우며 컵라면을 나눠 먹던 친구들이 있었고, 온갖 '고사'가 끝날 때마다 떡볶이 이천 원어치와 만화책 한 묶음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만끽했던 추억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미국 학교라는 광경 앞에서 그 소소한 행복이란 너무나도 작은 것이었다. 왠지 미안했다. 친구들에게, 일곱 살의 나에게, 숨 막히는 순간들을 그저 견뎌야 할 몫이라고 몰아붙였던 나 자신에게, 그리고 같은 모습으로 같은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을 미래의 나에게.
한국에 돌아온 뒤로 계속 부모님을 설득했다. 제발 유학을 보내달라고 사정하고 또 사정했다. 단단히 미국병이 들어서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미국만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반응은 냉랭했다. 유학 보내줄 여유가 없다고 하셨다. 줄곧 우리 집이 넉넉한 형편이라고 믿어왔던 나는 믿기 어려웠다. 소위 말하는 학군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북한산이 보이는 아름다운 동네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고 생각했던 나는 처음으로 우리 집의 현실적인 사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고환율까지 겹쳐 미국행은 영영 꿈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만 같았던 2010년. 거짓말처럼 국가 대표 선수이자 감독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아버지가 체육특기자로 영주권 발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2를 코 앞에 둔 내가 걱정스러우셨던 부모님은 이민 신청을 서두르셨고, 다행히 신청 3개월 만에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꿈꾸던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소식이었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 선택의 무게와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는 결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20년 가까이 다니셨던 직장에 명예퇴직 신청을 하셨고 그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우리 가족은 비행기에 올랐다.
"너 때문에 가는 거니까 잘해야 돼. 그럴 수 있지?"라는 말로 그렇게 나의 아메리칸드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