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홈스테이 경험담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와 공기업에 근무하셨던 어머니는 이민을 결정하시며 두 분 모두 명예퇴직을 신청하셨지만, 근속연수 20년을 채우기까지 아버지는 6개월, 어머니는 1년 넘는 기간이 남아있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는 내 사정이 급박했기에 지체할 수 없었고, 우리는 서둘러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선택하신 지역은 워싱턴주 시애틀로 아버지가 국가대표 선수였을 당시 캐나다 밴쿠버 전지훈련 기억이 너무 좋아 밴쿠버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 도시에 정착하고 싶다고 하셨다. 보통 해외 이민을 결정할 때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 곳을 고려하는 것과는 다르게 매우 모험적인 시도였다.
일가친척 혹은 가까운 지인조차 없었던 우리 가족은 우선 모텔에 숙박하며 시애틀 근교에서도 어느 지역이 정착하기에 가장 적합한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아버지 친구분 누님이 근처에서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그분의 도움으로 여차저차 홈스테이를 구하고 학교를 등록할 수 있었다.
홈스테이 예상 기간은 길어야 6개월이었는데, 아버지가 명예퇴직하실 때까지 잠시 동안만 부모님 없이 여동생과 나 둘이 홈스테이 가정에서 지내며 학교에 다니는 것이 우리 가족의 계획이었다. 홈스테이로 결정한 지역은 워싱턴주 안에서도 학군이 좋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안전하고 깔끔해서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라고 했다. 우리를 맡아주시게 된 한인 부부는 대학생 자녀들이 출가하며 적적하던 차에 기꺼이 홈스테이 요청을 수락해 주셨다. 아저씨는 우체부, 아주머니는 전업주부로 일하시며 미국에 사신 지는 25년이 넘었다고 했다.
난생처음 부모님을 떠나 타인의 삶에 함께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좋은 분들을 만난 덕분이었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철저히 타인이었기에 서로 선을 지키고 존중하는 환경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 줄곧 학생주임을 도맡으셨던 아버지는 매우 엄하고 예민하신 분인데 반해 홈스테이 아저씨는 느긋하고 무던하신 분이었다. 아주머니껜 어찌나 다정하신지. 어린 시절, 마냥 부러웠던 친구 아버지들처럼 내가 바라왔던 아버지 상에 가장 부합하신 분이었고 내게도 항상 친절히 대해 주셨다. 젊었을 적 한식당을 운영하셨다던 아주머니는 요리 솜씨가 무척 뛰어난 분이었는데, 매일 같이 우리의 아침을 챙겨주셨고 혹시나 불편하게 느끼는 부분이 없을까 매사 꼼꼼히 챙겨주셨다.
함께 생활하며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고, 이따금 두 분이 원래 내 부모님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우리의 모습이 점점 가족과 닮아가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셨는데 컴퓨터를 다루는 법을 어려워하셔서 매번 내가 영상을 찾아드리곤 했다. 피겨 선수 김연아의 엄청난 팬으로, 비디오테이프로 된 경기 녹화본을 자주 보셨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마지막으로 봤던 비디오테이프를 아직도 미국에서 사용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저씨는 사십여 년 전 미국에 이민 오신 뒤로는 한 번도 한국을 나가신 적이 없다고 했다. 아주머니도 그 오래전 펜팔로 실물한 번 본 적 없는 아저씨와 결혼하며 미국에 오셨고, 그 후론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하신 적이 없다는 말씀이 놀라웠다. 같이 저녁식사를 할 때면 두 분 모두 동생과 나의 한국 생활에 대해 듣고 싶어 하셨는데, 정말 피시방에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지, 텔레비전 모 맛집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와 같은 것들을 궁금해하셨다.
홈스테이 기간 내내 아저씨, 아주머니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는 다르게 정작 여동생과는 많이 싸웠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땐 동생과 시간을 보낼 일이 많지 않았다. 동생은 동생대로, 나는 나대로, 나이 차이가 꽤 있었을뿐더러 어울리는 친구들도 달랐고 각자 학원 다니며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에 동생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날도 많았다. 홈스테이를 시작하고 방을 같이 쓰며 꼼짝없이 붙어 지내는 신세가 된 뒤로는 사사건건 동생과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예민하고 남 눈치를 많이 보는 내 성격과 다르게 털털하고 솔직한 동생은 한국에서 가져온 간식들을 부엌에서 혼자 먹기도 했고,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시끄럽게 음악을 틀기도 하는 등 부모님이 안 계신 상황이 제 세상인 양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다. 어차피 돈 내는 건데 왜 눈치를 봐야 하냐던 동생의 만행(?)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나는 그럴 때마다 동생을 참 많이 다그쳤다. 물론 일방적으로 혼냈던 것은 아니고 대개는 나의 잔소리로 시작해서 육탄전으로 마무리 짓는 전개였다.
지금도 가끔 동생과 홈스테이 시절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한 번은 아저씨, 아주머니가 교회 일로 집을 비우신 틈을 타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엉엉 목 놓아 운 적이 있는데, 동생은 그때를 회상하며 "언니 정말 미친 사람 같았어"라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언니가 굉장히 힘들었을 거야"라고 이해해 주는 동생에게 나 또한 예의를 명목으로 동생을 숨도 못 쉬게 몰아붙인 날들에 대해 사과했다. 돌이켜보면 우리 둘 다 사춘기 시절, 낯선 환경과 새로운 상황에서 적응하느라 각자의 방식으로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