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고등학교 레슬링 대표팀 (Varsity) 입성기
처음부터 레슬링 선수가 되려던 건 아니었다. 집 근처 몇몇 고등학교 레슬링 팀에서 봉사하셨던 아버지를 도와 통역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레슬링 용어들이 익숙해졌고, 동작이나 기술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던 것이 시작이었다. 아버지의 궁극적인 목표는 레슬링 팀 코치가 되는 것, 혹은 유망한 선수들의 개인 코치를 따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니저처럼 보좌하며 언어적인 도움을 줄 사람이 절실하셨고, 내게 통역을 부탁하는 참에 레슬링도 함께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실제로 미국에선 대다수의 고등학생이 한 가지 이상의 스포츠팀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특히 아이비리그급의 좋은 대학을 가려면 스포츠가 필수였기 때문에 뜬금없는 제안은 아니었다.
한 번은 나도 스포츠를 한 가지 해야겠다는 강박감에 소프트볼과 배드민턴을 시도해 본 적이 있었는데, 소프트볼의 경우 조기교육으로 일찍부터 프로급 실력을 갖춰 온 백인 여학생들과 한 팀이 되어 합을 맞추는 것이 버거웠고, 배드민턴 역시 스매싱을 폭격 수준으로 내리꽂는 수준급 중국 학생들이 수두룩했기에 팀 선정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내 또래의 아시안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테니스나 크로스컨트리(오래달리기)는 너무 흔한 것 같아 시도해 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왠지 레슬링이 좀 더 특별(?)하게 느껴졌고 나중에 입시 에세이를 쓸 때도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겠다 싶어 결국 레슬링을 하겠노라고 수락했다.
사실 나는 운동이라곤 영 소질이 없었다. 국가대표 운동선수이자 감독이셨던 아버지의 유전자는 모두 동생에게 쏠렸는지, 동생에 비해 나는 타고난 운동 신경도 없었을뿐더러 행동이 느리고 뻣뻣했다. 그나마 한국에서의 초등학교 시절, 취미 삼아 검도를 배웠던 일 년이 유일한 공식 운동 경험이었다. 그 외로는 초등학교 때 맞벌이 었던 부모님을 대신해 외할머니께서 잠깐 우리 집에 와 계셨는데, 그때 너무 잘 먹었던지 과체중으로 몸무게가 불어난 탓에 아버지랑 매일매일 학교 운동장을 15-20바퀴씩 뛴 적도 있었다. 줄넘기도 꽤 오래 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해서였는지 기본 체력은 있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레슬링이라는 과격하고도 역동적인 운동을 감당해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체력부터 확실히 다져야겠다며 매일 러닝머신 30분 후에 근력운동 30분을 명령하셨다. 때는 11학년, 한국으로 치면 고3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성적 관리며 대입 준비며 여러 가지가 겹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었지만, 스포츠 또한 놓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체력이 늘었는지 오히려 몸은 활력이 넘쳤고, 한국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만 할 때보다 실질적인 공부 효율성도 훨씬 좋아진 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몸이 준비된 이후에는 아버지가 봉사하셨던 우리 학교팀에서 함께 훈련을 받는 것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팀에서 나는 유일한 여성이자 동양인이었다. 레슬링 팀에 속한 학생들은 대부분 건장한 체격의 백인 남학생들이었고, 가을 풋볼 시즌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겨울 스포츠인 레슬링으로 팀을 옮겨 훈련을 받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덕인지, 아니면 팀 내 홍일점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다들 내게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중에 가장 어리고 호리호리한 남학생이 내 파트너가 되어 함께 스파링을 하곤 했다. 평소 기술 훈련에서는 날 너무 조심스럽게 대해서 이게 제대로 연습이 되려나 싶을 때도 있었는데, 막상 스파링할 때는 경쟁심이 생겼는지 둘 다 꽤 몰입해서 진지한 태도로 실전에 임했다.
곁에서 일련의 훈련 과정을 지켜보던 헤드 코치는 내게 충분히 대표팀(varsity) 소속이 되어 다른 학교들과 경쟁할 수 있을 거라고 칭찬했다. 공식적인 대표팀 입성의 순간이었다. 운동에 소질이 없었던 것은 물론, 조용하고 내성적이어서 그 존재감이 거의 투명 인간에게 가까웠던 내가 어쩌다 보니 학교 최초 여자 레슬링 선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