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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싼 Oct 20. 2024

충분히 잘하고 있어

누군가에겐 너무나 폭력적인 말

  한국에서 나는 활발한 편이었다. 엄청나게 활동적인 성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늘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고, 말하기 대회에 참가하거나 학교 행사 진행을 맡을 정도로 나서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학급 회장도 꽤 여러 번 했다.


 미국에 온 뒤로부터는 이런 성향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특히 홈스테이를 떠나 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한 뒤로부터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나날이 내향적인 모습으로 바뀌며 내 안으로 숨으려는 나를 발견했다. 학교에서는 거의 투명 인간처럼 지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고 마음 붙일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국에 온 지도 어느덧 일 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낯설었고, 영어는 버거웠다.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신 관리를 위해 밤을 새우는 날들은 여기서도 계속됐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할 수 없는 상황은 여전했고, 같은 공부라도 언어의 장벽으로 동급생들보다 네다섯 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겨우 비슷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학구열이 높은 동네에서 인종을 가릴 것 없이 튜터와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한 학기 등록에 만불이 넘는 학원을 보내달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어, 온전히 내 힘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미국에서 늦게 시작한 만큼 조금이라도 빨리 대입을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현실이 너무나 막막했다. 스포츠와 교내/외 활동 등 준비해야 할 게 한국보다 훨씬 많았지만 기본 성적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벅찼다. 카운셀러(담임교사 역할)를 비롯한 선생님들에겐 아무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성적을 높게 받으려 추가 과제 기회를 찾거나 교내 활동을 찾을 때도,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뭘'이라는 식의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뿐. 특히 카운셀러는 내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2년제 커뮤니티 컬리지 대학은 들어갈 수 있다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치고 그 정도 하는 것만 해도 잘하는 거라며 나를 추켜세웠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내게는 '너는 절대 못 할 거야'라는 말보다 더 잔인하게 들렸다.


 교실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워낙 선생님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인도, 중국계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선생님은 내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내게 관심이 없었고, 당연히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루는 생물 수업 중 토론이 참여점수에 포함되었는데, 내가 너무 빠른 속도로 주제가 계속 바뀌는 대화를 잘 따라잡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하점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영어 때문에 그랬다고 설명하자, 선생님은 내게 "네가 지금처럼 이유를 설명할 정도로 영어를 할 수 있으면 토론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지 않겠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미국에는 평생 외국어를 배워본 적이 없어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고충과 그 단계별 어려움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결국 그 생물 선생님은 오피스에서 내가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기록을 확인한 후에서야 최하점수를 취소해 주었고, 앞으로 토론에선 무조건 동의한다는 뜻의 "I agree"라는 대답만 해도 정상 점수를 주겠다고 했다. 불필요한 의심에 대한 사과는커녕,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 대신, 학생에 대한 목표와 기대치를 낮추는 대처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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