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홈스테이의 끝
홈스테이를 처음 시작했던 2월부터 부모님이 미국에 도착하신 7월까지. 5개월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덧 아저씨, 아주머니와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좋은 분들을 만나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너무나 큰 행운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홈스테이 아주머니는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뒤돌아 멀어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은 반가움에 들떠 계셨지만 이따금 부모님의 얼굴에서 근심이 보였다. 특히 아버지 표정이 어두웠다. 어머니는 명예퇴직 신청까지 아직 일 년이 더 남아 있었으므로, 우선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우리 자매 둘, 이렇게 셋이서 미국에서 일 년 동안 지내는 것이 계획이었다. 어떻게보면 우리 가족의 이민은 연착륙 작전인 셈이었다. 말이 쉽지, 아버지 혼자 낯선 땅에서 우리를 돌봐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셨을 것이다.
사실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느끼는 긴장과 두려움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나와 동생은 익숙한 지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으로 이사하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더군다나 워낙 예민하고 엄한 성격의 아버지였기에 중재자인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하며 예상대로 여러 난관에 부딛혔다. 새 도시로 이사하면서 아파트를 계약하고, 필요한 가전과 가구를 구입하고, 은행계좌와 신용카드를 마련하고. 정착에 필요한 일련의 모든 과정이 게임 속 퀘스트처럼 눈 앞에 펼쳐졌다. 다행히 같은 지역에 어머니 직장 동료분 친척이 살고 계셨고, 일부 도움을 주셨지만 남에게 신세지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아버지의 성향 상 대부분의 과정은 우리 가족 스스로 극복해야하는 과제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나마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나와 동생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 대신 주로 내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나의 영어 실력은 기껏해야 아버지와 동생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으므로 결코 아버지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일이 많았다. 한 번은 이케아에서 가구를 사는데 침대를 조립하기 위한 세트 두 개가 필요한 상황에 내 실수로 하나만 구입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쳐다보는 매장 한 가운데에서 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아파트에 살며 여러 문제로 매니저와 시시비비를 가려야할 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경우, 그 잘못은 언제나 통역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내 몫이었다. 나는 통역만 했을 뿐인데 미국사람 편을 든다며 감정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각종 고지서와 우편물 통역도 모두 내 담당이었고, 조금이라도 귀찮거나 싫은 내색을 하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영어를 못하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거냐고 역정을 내시는 일도 잦았다. 나랑 동생은 종종 미국인처럼 행동한다는 이유로 혼이 났는데, 미국인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아버지 기준에서 버릇 없고 배려심 없이 행동하는 것으로, 유독 동생이 그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미웠다. 당시 나는 학구열 높은 새 학교에서 적응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벅차고 힘들었다. 학부모로서 도와주진 못할 망정, 되려 스트레스만 주는 아버지가 보호자라기보단 짐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계속 홈스테이에 남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버렸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도 자주 했다.
미국에서 보호자로서 아버지의 주된 임무는 우리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아침과 저녁을 해먹이고, 점심 도시락을 싸주는 것이였다. 홈스테이 아주머니에 비하면 모든 면이 부족했다. 특히 아버지가 점심으로 먹으라고 싸주시던 햄버거는 최악이었다. 미국 '세이프웨이'라는 동네 마켓에서 여러 묶음을 할인해서 파는 싸구려 빵에, 계란 부침, 딸기쨈과 땅콩버터, 사과를 넣어 호일로 감싸면 아버지식 햄버거가 완성되었다. 아침에는 나름 그럴싸한 모습이었지만, 점심 시간 쯤 되면 사과에서 나온 과즙이 빵까지 흥건히 배어나와와 형체가 일그러졌다. 눅눅해진 햄버거를 먹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창피한 마음에 줄곧 화장실 장애인 칸(시설이 좋고 넓어 아늑하기 까지 했다)에서 혼자 먹곤 했었다.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동생은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싸주신 햄버거를 먹은 적이 없었다며, 버리고 그냥 학교 급식을 사먹지 왜 미련하게 그 햄버거를 먹었냐며 우스워했다.
그러게. 나는 왜 그렇게 눅눅해진 햄버거를 버리지 못했을까. 돌이켜보면 죄책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죄책감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감정일 수도 있겠다. 20년을 넘게 중학교 체육 교사로 근무하셨고, 체육교사로 일하기 전엔 국가대표 선수와 감독으로서 누구보다 자부심을 느끼셨을 아버지였다. 한국에서의 보람찬 커리어가 하루 아침에 두 딸 뒷바라지하는 일상으로 변하고, 언어의 장벽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가장이라는 자리에서 몇 곱절은 더 가중되어 아버지를 더욱 힘들게 했을 것이다. 나는 왠지 그 모든 이유와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술만 드시면 "너 때문에 여기 왔는데"를 반복하시던 아버지 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노력하셨다.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경력을 살려 현지에서 고등학교 코치를 해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스포츠가 보편적인 미국 학교 시스템에서 학교 운동 팀 코치는 좋은 보수가 아니었고, 영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에게 허락된 자리는 기껏해야 석 달에 천 불 정도 받는 보조 코치 뿐이었다. 아버지의 통역을 위해 따라갔던 면접 자리. 기본 소통도 어려운 영어 실력으로 스포츠 활동시 생기는 응급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 묻던 교장의 차가운 눈빛과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말을 통역했던 그 순간의 긴장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결국 아버지는 원하던 직장을 얻지 못하셨고 꽤 오랫동안 직업없이 우리 뒷바라지만 하셔야했다. 영어를 배우신다며 커뮤니티 컬리지 ELL 프로그램을 들었지만 오십세가 넘어 배우는 영어가 쉽지 않았다. 평생 운동만 하신 분이셨기에 더 어려우셨을 것이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매우 일찍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시면서 기초 학업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엘리트 체육의 피해자였다.
아버지가 못 견딜만큼 미워질 때마다 이 사실을 계속 되뇌이려고 했다. 아버지를 불쌍하게 여기고 애써 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것 말고는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의 나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