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후텁지근해서 시원한 녹차에 밥을 말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는 물에 밥 말아 먹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소화에 방해가 된다는 엄마의 철칙 같은 것이 있었다. 밥에 물을 말아 먹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게) 감기에 걸리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입맛이 없을 때 정도였다.
보리차, 둥굴레차, 옥수수 차, 상황버섯차 등 집에는 부지런한 엄마가 끓여놓는 차들이 항상 있었다. 보리차조차도 반찬으로 즐길 만큼 입맛이 좋은 사람이었던 나는 입맛이 없다가도 엄마가 끓여 놓은 진한 보리차에 밥을 말아 먹으면 금세 입맛을 회복하곤 했다.
연어 오차즈케라는 음식을 만나고 나서 경이로움을 살짝 느꼈던 기억이 난다. 밥에 물을 말아 먹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던 우리 집에 비해 밥에 물을 말아 먹는 요리가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밥에 물을 말아 먹는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고, 물 만 밥에 귀한 연어를 올려 먹다니! 하고 놀라버렸다.
우리에게도 물 만 밥에 생선을 곁들이는 음식의 대표 주자로 보리굴비 정식이 있다.
보리굴비 정식과 연어 오차즈케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막상 접해보면 우선 향기에서부터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녹차물이나 보리차와 같은 찻물에 밥을 말아 잘 구운 보리굴비 한 점을 올려 먹는 보리굴비 정식에서는 구수하면서 중독성 강한 쿰쿰한 고린내가 밥 두 그릇을 부르고, 연어 오차즈케의 달콤한 풀 내는 무더위에 지쳐 입맛을 잃은 한 여름의 입맛을 돌아오게 한다.
풍요로운 가을의 색감인 보리굴비 정식은 대체로 보리굴비와 밥과 찻물이 따로 세팅되어 나오지만 싱그러운 한여름의 색감인 연어 오차즈케는 밥과, 찻물과 연어가 한 그릇에 세팅된다.
날씨가 더우니 시원한 물에 밥을 말아 먹고 싶었다. 소화 안되게 뭐 하러 밥에 물을 말아 먹느냐며 자나 깨나 자식의 건강 걱정뿐인 엄마의 잔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괜찮아, 엄마. 밥에 물 한 번 말아 먹는다고 뭔 일 안 생겨!’라고 혼자 대꾸하며 연어 오차즈케를 시작한다.
보리차, 옥수수 차, 메밀차등 입맛에 맞는 다른 차와 먹어도 되지만 오늘은 오리지널 격인 녹차와 먹기로 했다. 연어 오차즈케에 사용할 녹차물은 티백 녹차로 우려도 구수하고 맛있지만 진한 녹차향을 먹고 싶은 날엔 가루 녹차를 사용한다.
기분을 내면서, 특별한 것이 생각날 때, 간단하게 상을 차리기에 연어는 꽤 괜찮은 식재료다. 작은 연어 한 덩이를 사서 구우면 스테이크도 되고, 연어 오차즈케도 되고, 샐러드도 되고, 반찬도 되고, 덮밥도 된다. 소화가 안 돼서 물에 밥 말아 먹는 것에 거부감이 있으면 연어 덮밥으로 먹어도 되고, 밥과 연어 반찬으로 먹어도 된다.
오차즈케 먹는 김에 6월 9일에 담가둔 매실 장아찌 한 병을 개봉하였다. 매실 장아찌를 개봉하기엔 이른듯했지만 맹숭맹숭한 연어 오차즈케에 곁들이기에 이만한 것이 없겠다 싶으니 참을 수 없었다. 작은 매실 장아찌 병을 개봉하였다. 뚜껑을 열자 새콤달콤한 매실 장아찌 향이 올라온다. 양념하지 않고 오차즈케와 먹었는데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나 시다.
◎ 마음 부자가 되는 순간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안 맞을 걸 알면서 기어이 확인해 보는 마음. 아니라는 걸 알면서 기어이 해보는 마음. 고집과 미련, 의지와 집착의 어디쯤에서 기어이 직접 해보고, 확인해 보고서야 깨닫는 얇은 셀로판지 같은 지혜와 뒤따라 오는 후회.
실수와 실패의 재생이 스스로 내뱉는 탄식을 들을 때마다 빠르게 한 가지를 떠올린다.
"후회는 없다. 교훈뿐."
실수로 잠식되는 부정적인 늪에서 벗어나고, 나아가 모든 경험에서 사소한 것이라도 배우기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있다. 침체되거나,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는 순간에도 '후회는 없어. 교훈뿐.'이라고 생각하며 제자리로 돌아온다. 모든 경험엔 교훈이 있고 배움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눈이 떠지고,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길이 보인다. 조급함이 멀어지고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마음 부자가 되는 순간이다.
날이 무더워서 절임류와 청들이 예정보다 빠르게 맛이 들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같은 날 담가 놓은 매실청과 개복숭아청도 조금 이르게 개봉해야 하는 것일까, 아리송해하며 때이르게 매실 장아찌를 개봉한 실수와 비슷한 실수를 하기 직전, 또다시 가볍고도 어려운 선택의 상황에 놓였다.
<아주 쉽게 연어 오차즈케 만드는 법>
▽재료(3인분):
- 연어 3덩이(422g)
- 식용유 1스푼
- 물 3스푼
- 쯔유1스푼
- 녹차물(녹차가루+물)
- 얼음
- 쪽파
- 플레이크
*밥숟가락 계량
▽만드는 법:
- 팬에 식용유를 살짝 두른다.
- 팬에 연어를 올린 뒤 앞뒤 겉면이 살짝 익도록 굽는다.
- 쯔유물(물3+쯔유1)을 붓고 연어를 졸인다.
- 그릇에 밥, 연어, 플레이크, 쪽파를 담은 뒤 녹차물을 부어준다.
*기호에 따라 녹차물에 얼음을 추가한다.
*녹차물 대신 보리차, 옥수수 차, 둥굴레차, 메밀차 등 취향에 따라 다양한 차를 부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