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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사라 Oct 24. 2021

산다는 것은 시련을 감내하는 것

《죽음의 수용소에서 》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긴 터널을 지나왔다. 긴 터널은 유독 나에게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느껴졌다. 터널이 언제 끝이 날것인지, 환한 행복한 세상을 꿈꿀 수 있을 것인지를 의심하며 살아왔다.  


내가 걷는 터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 우울의 늪에 자주 빠졌다.

습관적으로 우울에 나를 밀어 넣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터널을 지나온 그는 그 터널 속에서 깨달은 교훈을 한 권의 책에 담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에서 얻은 강렬한 교훈을 통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책으로 기록을 남겼다.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수용소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입증된다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 존재의 그 모든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삶에 대해 "yes"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 한 권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파급력을 발휘했는데 빅터 프랭클이 직접 강제수용소란 극한의 상황을 겪어낸 체험담이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 네 곳을 전전하면서도 끝까지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성자처럼 버티어 나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생환해온 산 증인으로 살아냈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1997년 92세의 삶을 마칠 때까지 그의 영혼은 호수처럼 맑았다고 후학들은 전하고 있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경험한 수용소에서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통해 "의미 치료", 로고 세러피를 완성했다.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서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 내는 것, 빅터 프랭클 박사가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실존적 분석', 로고 세러피이다.      


프로이트와 빅터 프랭클 둘 다 신경질환의 특성과 치료에 우선적인 관심이 있었다.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찾았다. 반면 프랭클은 신경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중 몇 가지는 그 원인이 환자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에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프랭클 박사는 우스꽝스럽게 헐벗은 자신의 생명 외에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수용소에서 생생히 보았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삶을 지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는 것으로 굶주림과 수모, 공포, 불의에 대한 깊은 분노의 감정을 삭인다. 하지만 이런 시련에서 더 큰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어야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을 수 있음을 설파한다.     


"산다는 것은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

《죽음의 수용소에서 》     



삶에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음을 알고 그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 하고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프랭클 박사를 강조한다. 그래서 "왜 살아야 하는지는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디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희망과 용기의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인간의 정신상태-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와 육체의 면역력이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지를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의 경험을 통해 증언한다.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갑자기 급격히 증가했는데 수용소 주치의는 이 기간 동안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이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사정의 악화, 기후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돌 아달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려오지 않자 용기를 잃었고,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고,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쳐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고 급격한 사망률을 설명한다.     


정신적인 희망과 절망이 우리의 육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해 준 대목이다. 나도 갑상선암이 발견된 이유가 아마도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다니면서 내 인생 최고의 절망감을 경험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일 거라 나는 추측하곤 했다. 졸업반이 되기 전까지는 나에게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졸업반이 되고, 마지막 학기에 이르러 내 앞의 현실이 벼랑 끝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11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정상에 올랐는데 정상에 오르니 벼랑 끝인 현실에 한편으로는 분노가 되었고, 극한 절망감이 나를 덮쳤다.      


그 무렵 희귀 암을 투병하다 먼저 소천한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깊은 절망을 느꼈다.  나의 진로가 암담한 현실에 절망감이 곱빼기가 되었다. 그때의 절망감이 아마도 갑상선에 있던 혹을 악성종양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나는 추측했다. 빅터 프랭클이 동일한 맥락에서 절망감과 육체의 연관성을 경험과 사례를 통해 설명하니 더 공감과 이해가 되었다. 





빅터 프랭클이 로고 세러피의 마지막 결론으로 대안으로 제시하는 부분에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나치 수용소처럼 

처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우리는 "예스"로 대답해야 한다.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요소일지라도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바꾸어 놓는 창조적인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데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할 때 그 

창조적인 능력이 발휘된다고 이야기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그 비참한 상황도 우리에게 의미를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늘 현실은 처참하고 절망스러웠지만 그 현실을 바꿀 힘도 없었지만 순간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내 삶의 의미가 되고 교훈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삶의 의미와 교훈은 터널이 끝나야 보이고 알 수 있다.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날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터널 끝이 나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야 한다. 

한걸음 한걸음을 최선을 다해 걷다 보면 터널의 끝이 보인다.     

그 터널의 끝에 이르면 터널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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