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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Jul 01. 2024

나에게 ADHD를 유전시킨 용의자를 찾아서

ADHD는 가족 연관성이 높고 유전적 요인이 많이 작용하는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나 역시 정신과 전문의로부터 유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들었다. 내 동생들은 나와 다른 면이 많다. 용케도 ADHD 유전자를 피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나에게 ADHD를 유전시킨 분은 누구일지 용의자들을 지금부터 추적해 보기로 한다.


제1 용의자 -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자식을 7명을 낳으셨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성과 바람이 나셔서 세 번째 아들인 우리 아빠를 그 여성에게 선물하려고 하셨다고 한다.


한 때 회사에 다니면서 안정적인 생활도 하셨으나, 가산을 탕진하시고 말년에는 막걸리를 주식으로 드시는 생활을 하셨다.


나는 유치원 입학 전 시골의 할아버지 집에서 잠시 자랐는데, 할아버지는 나에게 주전자를 주시며 동네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를 받아오게 하신 적이 있다. 할아버지처럼 산만했던 나는 막걸리를 받아서 집으로 가던 중 주전자 속의 막걸리를 길에 뿌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막걸리를 모두 소비하였다.     


할아버지는 평소 어린이인 나를 손가락으로 매우 빠르게 찌른 후 모른 척하다가 내가 “할아버지가 방금 내 뺨 찔렀어?”라고 하면 진지하게 발뺌했다. 내가 “그럼 누가 찔렀어?”라고 하면 “이 집에 귀신이 산다.”라고 하여 내가 밤에 화장실도 못 가고 이불에 오줌을 싸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유치원 입학 전인 나에게 담배 심부름 시키심.

                      

제2 용의자 - 아빠

조상과 가문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이 강하셨다. 삼 남매를 앉혀놓고 우리 조상님이 과거 시험을 치르러 갈 때 ‘학’을 타고 가셨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학이 내비게이션 달린 것도 아니고 어떻게 시골에서 한양을 찾아가나. 그리고 학보다 무거운 조상님을 어떻게 태운단 말인가.

네? 학이요?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 학과 조상님의 숙식,그리고 각자 화장실 해결방식 이런 현실적인 것들을 생각하니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아빠에게 집중하는 척하느라 힘들었다.


그리고 우리 삼 남매가 공부를 게을리할 때마다 아빠는 어린 시절 가난해서 책을 살 돈이 없었고, 산에서 나무를 해서 시장에 판 다음 영어사전을 샀으며 그 영어사전을 외울 때마다 한 장씩 찢어서 섭취하셨다고 했다. 


영어사전 섭취 부분에서 충동성,학 얘기에서 깊은 생각 부족 집중력 부족,산만함 추정.


제3 용의자 - 윗대 조상님

방계혈족인 큰아버지로부터 추정한다. 나의 큰아버지는 상황이나 장소 시간과 관계없이 만나는 상대방에게 느릅나무 달인물을 마셔야 한다고 라디오 틀어놓은 듯이 무한반복 말씀하신다.


과거 오락실 운영. 큰아버지 본인 진술로 바람 50번 피우심. 


진솔하게 쓰고 보니 사자명예훼손죄 이런 느낌이지만, 이것도 내 존재의 뿌리를 찾아서 가는 과정이다.


가끔 할아버지, 아빠를 떠올릴 때면 할아버지와 아빠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계시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나와 닮은 면이 많으셨다.


[ADHD 유전자 화살을 나에게 쏘고 계신 조상님들]

TV를 보면 무슨 비행만 하면 ADHD 아니냐고 하는데, 그것은 ADHD가 아니더라도 부모의 잘못된 양육과 훈육방식, 아이의 기질과 환경, 또 다른 유전적 소인들이 영향을 미친 결과일 수 있다.


오히려 ADHD인 사람들은 주도면밀한 면이 없어서 순수한 사람이 많다.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나는 60대가 되어서도 어린 시절 조상님이 학을 타고 과거를 보러 가셨다고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를 여전히 믿고 있었던 우리 아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사회성이 부족하다 싶은 어린 시절도 보냈고 지금도 하루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불킥 하거나 길에 털썩 앉고 싶은 순간 투성이다(특히, 장례식장에서 상주에게 폐백절을 올린 기억은 꽤 오래갔다).

               떠오를 때마다 미춰버릴 것 같아...


나는 어린 시절 ADHD의 알려진 특징, 충동성이나 산만성은 당연히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것들은 생활기록부에 '호기심이 많음, 질문이 많음'으로 순화되어 표현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특징이 있었지만,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성인 ADHD임을 고백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증상은 바로 '수면장애'다. 무서워서 혼자 못 잤거나 잠들기 어렵거나 자더라도 깊은 수면이 어렵고 자꾸 깨거나.


그리고 성인 ADHD는 보통 1+1으로 다른 증상들이 있었다. 불안이나 강박, 우울 등 다른 친구가 세트로 따라붙는다.


나의 경우에는 내가 산만해서 실수할까 봐 혹은 충동적으로 계획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까 봐 불안이 있었고 그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있었다. 이 증상들이 적절했을 때는 계획을 세우고 미리 대비하거나 노력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그 적절한 불안과 강박을 '예쁜 불안', '예쁜 강박'이라고 하고 싶다.


그러나 안 예쁜 증상도 있었다. 이 다양한 1+1 친구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어서..

유전이라니. 

억울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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