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와 타자의 수싸움
야구 중계를 보다 보면 선수들이 참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들어오는 직구를 대체 왜 못 치는 걸까, 저렇게 멀리 빠지는 공에 왜 배트가 나가는 걸까 하면서요. 많게는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으면서 하루 종일 야구 훈련을 하는데 안타 하나 못 치고 경기가 끝나는 날에는 허무함마저 느껴집니다. 투수들이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공을 집어넣지 못하는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기에는 참 쉬워 보이는데 실제 경기는 언제나 내 마음같지가 않습니다. 물론 선수들 개개인의 컨디션 문제도 있지만, 이 때는 투수와 타자가 맞대결할 때의 심리를 파악하면 조금 더 야구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볼카운트 0-0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앞서 투수와 타자는 각각 3개의 스트라이크와 4개의 볼이라는 기회 안에 승부를 해야 합니다. 선수들은 각각의 볼카운트마다 투수가 어떤 구종의 공을 어디로 던질지에 대한 수싸움으로 하면서 타석에 서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이 많아질수록, 그러니까 볼카운트가 달라질 때마다 타자들의 실제 성적도 달라질까요?
자, 위의 표는 2020년 초에 팬그래프닷컴에서 분석한 각각의 볼카운트에 따른 타자의 wOBA(조정 출루율) 차이입니다. wOBA는 타자의 출루 유형에 따라 가중치를 적용한 출루율인데, 쉽게 말해 타율이나 출루율보다 조금 더 신뢰도가 높은 지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첫 번째 열은 볼카운트, 두 번째 열은 해당 볼카운트 이후 타자의 wOBA 결과, 세 번째 열은 해당 볼카운트에서 타자의 평균 wOBA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케이스들만 뽑아서 살펴볼까요? 2스트라이크 이후 타자의 wOBA는 3할 초반대에서 겨우 2할로 줄어들었고 반대로 3볼 이후에는 무려 5할 4푼 4리까지 1.7배가 넘게 치솟았습니다. 이게 얼마나 높은 수치냐 하면,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서 5할이 넘는 시즌 wOBA를 기록한 사례는 겨우 36번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선수들이 말하는 '수싸움' 내지는 '멘탈 싸움'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투수가 던진 공이 홈플레이트까지 날아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0.4초. 사실상 공을 보고 방망이를 낸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들은 투수들이 어떤 공을 어느 코스에 던질지 대략이라도 예측하면서 타석에 들어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야구에서 타자는 비교적 수동적인 입장에 서 있습니다. 투수는 본인의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구종과 코스를 결정할 수 있지만, 타자는 근본적으로 투수의 공에 맞춰 대응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격적인 투수를 만나 0-2 카운트까지 몰리게 되면 타자의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아무리 본인의 존이 확실하다고 해도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는 애매한 공에까지 방망이가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이번에는 변화구로 나를 유인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스트라이크존 근처로 공이 오는 것 같으면 어떻게든 맞춰서 커트라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중계를 볼 때 저 멀리로 빠져나가는 유인구에 허무하게 타자의 방망이가 나가는 이유입니다.
반대로 투수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카운트에 따라 의도적으로 볼을 던지면서 타자의 심리를 파악할 수도 있죠. 하지만 투수의 수싸움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2-0이나 3-0처럼 볼카운트가 몰리게 되면 투수는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지 않기 위해 '반드시 이번 공은 스트라이크존에 넣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타자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타자에게 유리한 카운트가 되면 타자는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들어올 투수의 공을 기다리면서 노려 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위에서 언급한 표에서도 2볼 이후와 3볼 이후 타자의 wOBA는 각각 1.35배, 1.73배나 증가합니다). 중계진이 말하는 '완벽하게 노려 쳤다'고 말하는 상황이 보통 이런 경우입니다. 타자가 해당 볼카운트에서 투수의 심리를 읽어서 깨끗하게 공을 쳐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까지 이해하면 왜 투수가 그렇게 다양한 구종을 던지는지, 그리고 일관된 투구폼과 디셉션(투수가 공을 던지기 직전까지 숨기는 동작)이 중요한지 이해가 됩니다. 볼카운트뿐만 아니라 현재 어떤 루상에 어떤 주자가 나가 있는지, 아웃카운트 상황은 어떤지, 점수차는 얼마나 나고 있고 지금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누구인지 등에 따라 시나리오는 무궁무진하게 늘어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서는 '정석적인 시나리오'가 어느 정도 존재하지만 언제나 그 시나리오대로 공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타자의 허를 찔어야 하니까요. 이런 측면에서 진짜 공을 잘 던지는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잘 던지는 투수가 아니라 볼을 잘 던지는 투수입니다.
예를 들어 타자의 몸쪽으로 공을 크게 붙이는 위협구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몸에 거의 맞을 것 같은 공을 던져 타자가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만드는 효과도 있고, 몸쪽 공을 보여준 뒤 바깥쪽에 걸치는 공을 던져 타자 입장에서 두 번째 공이 엄청나게 멀게 느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스트라이크존에서 크게 빠지는 공을 던졌다가 비슷한 코스에서 스트라이크존으로 꺾여 들어가는 변화구로 타자를 속일 수도 있구요(이런 식으로 다음에 던질 공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던지는 공을 '셋업피치'라고도 부릅니다).
볼넷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 1사 주자 2루 상황에서 상대팀 최고의 강타자를 만났을 때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투수에게는 2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차라리 장타를 허용하느니 속아 주면 고맙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타자를 유인하거나, 아니면 진짜 승부를 하거나. 안타만 맞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유인구를 던져 주자 1, 2루 상황이 되면 다음 타자를 병살타로 잡는다는 전략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아까 타석에서 승부의 주도권은 투수에게 있다고 말했죠? 이렇게 투수와 포수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세워 좁게는 지금 타석에 있는 타자, 더 넓게는 이번 이닝 전체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만 합니다.
누가 봐도 평범한 구속을 가지는 투수인데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타자들이 공략을 못 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구속도 괜찮고 구위도 좋은 투수가 갑자기 성적이떨어지는 경우도 있구요. 물론 다른 요인들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투수의 볼배합, 즉 피칭 디자인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보통 '투수의 패턴이 타자에게 공략당했다'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타자가 예측하지 못하도록 시나리오를 다양하게 가져가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선수들이 어떤 시나리오로 경기를 풀어 나가는지, 선수들의 수싸움을 예측하면서 야구를 보는 것 또한 야구의 재미 중 하나입니다.